이달 초, 변희수님이 세상을 떠났다. 트랜스젠더인 변희수 하사는 군 복무 중 성확정 수술을 받았고, 계속 복무를 희망했으나 심신장애를 이유로 강제 전역되었다. 변 하사는 이 강제 전역의 부당성을 다투는 행정소송 첫 기일을 앞두고 있었다. 그 전주에는 김기홍님의 부고가 있었다. 그는 커밍아웃한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였다. 음악 교사였고, 녹색당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었다. 성소수자 가시화를 위해 노력했다. 다음달 4월 26일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구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청소년 활동가였던 육우당님의 18주기다. 그가 세상에 살아 있었던 시간과 그가 세상을 떠난 시간이 같아지는 날이다.
이 목록은 끝이 없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 소리내어 이유를 말하지 못했던 이별은 더 많았다.
그리고 이 이별에는 매번 이유가 있었다. 가해가 있었다.
육우당님의 부고 뒤편에는 동성애자 커뮤니티 사이트가 청소년 유해 매체라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의 강경한 주장이 있었다. 김기홍님의 부고 뒤편에는 성소수자 이슈를 정치담론장의 잡음이나 해악으로 치부하는 수많은 말이 있었다. 어떤 말들은 유력 정치인의 입에서, 어떤 말들은 혐오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 변희수님의 죽음 뒤편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강제 전역을 강행한 군이 있었다.
소수자의 죽음은 결코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다. 싸우다 지친 사람들, 말하다 상처 입은 사람들, 먼저 한 걸음 나서 길을 만들어보려다 스러진 사람들의 뒤에는 그들을 생의 끝으로 떠민 아주 크고, 잘 보이고, 지치지 않는 집단적 혐오가 있었다. 사회의 가해가 있었다. 혐오를 거리낌 없이 말하는 목소리와,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표정과,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표현이 있었다. 청소년 유해 매체. 소돔과 고모라. 하나님의 진노. 보지 않을 자유. 연기신청거부. 민간인. 정신병자. 먼저 떠난 활동가들의 이름 뒤에 붙는, 언급하고 싶지 않은 연관 검색어들. 빼앗기고 찢어진 무지개 깃발. 국회 정문에서 밀려나는 경험. 아무도 보지 않는 기자회견. 거리 발언하는 활동가를 붙잡고 그러다가 지옥 간다고 고함 지르는 ‘시민’. 그 끝없이 닥쳐오는 혐오의 파도.
혐오는 집요하고 힘이 세고 지치지 않는다. 무릎 깊이 바닷물 속에 서서, 허물어지는 모래를 발가락에 억지로 힘을 주어 쥐고,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에 맞서는 것 같다. 어떤 개인도 이런 파도에 계속 맞설 수 없다. 주저앉아 떠내려가는 것은 한순간이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 손을 잡고 맞서려 해보아도 쉽지 않다. 같이 떠내려가는 것도 한순간이다. 이런 집요함에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밀물 때와 썰물 때가 있을 뿐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손을 놓아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우리는 또 누군가를 잃는다.
우리는 죽어서 지옥 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애당초 여기가 지옥이다. 이 끝없이 닥쳐오는 혐오의 파도를 맞고 서야 하는 바닷가가, 2021년 대한민국이, 지옥이다. 나는 더이상 우리 사회가 차별 없는 세상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차마 그렇게 큰 꿈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가 살아서 이 지옥에 함께 머무르기만을, 그것도 간신히, 바라며, 억지로 숨을 쉬고, 손을 잡고, 발가락에 힘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