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는 매우 좋은 영화지만 할 말이 많은 영화는 아니다, 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맑고 투명하며 정직해 보였고, 영화의 국적부터 의미까지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온 탓도 있다. 하지만 막상 걸음을 떼고 보니, 내가 가진 언어의 역량으로 포획하기 힘든 장면들이 너무 많다. <스파이의 아내>를 비롯해 최근 부쩍 그런 영화들이 극장에 걸려 괴롭고, 행복하다.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금도 눈만 감으면 어둠 속에서 덜거덕거리며 달리던 마차 소리가 들리다가 다음 순간 그 소리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신기한 망각의 세계로 빠지고 만다. 그날 밤에 느꼈던 감정들은 너무도 생생해서 손만 뻗으면 어루만질 수 있을 정도였다. (중략) 이제 나는 바로 이 길이 우리를 다시 연결시켜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든, 우리는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그 소중한 과거를 함께 소유하고 있었다.” (윌라 캐더 저, <나의 안토니아> 중)
윌라 캐더의 소설 <나의 안토니아>의 마지막 문구를 읽고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전혀 다른 묘사, 다른 이야기임에도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의 몇몇 장면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니, 이 문단을 통째로 가져와 영화의 에필로그 내레이션으로 쓴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으리라. 정이삭 감독은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나의 안토니아>를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인터뷰에서 여러 차례 밝혔다. 작가 윌라 캐더가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길 시작하면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이 자신을 일깨웠다고 했다. 다른 시대, 다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두 작품의 잔상이 닮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경외와 기억, 두 단어 사이에 놓인 간극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미나리>는 감독의 자전적 체험을 재료로 지은 집이다. 꽤 많은 에피소드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각색됐다. <미나리>에 대한 호평 중 상당수가 영화의 사실성, 생생함을 꼽는 반응이 적지 않고 어떤 경우엔 거의 사적 다큐멘터리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나리>는 개인적 체험을 담담하게, 차례대로 서술하는 종류의 영화가 아니다. 차라리 과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의미를 구조화해 쌓아올린 유리의 성에 가깝다. 재료는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했을지 몰라도 그걸 집으로 건축한 방식은 실로 의식적이고 투명하다. 미국 사회와 계급성, 이민의 기억 등을 상징적으로 배치한, 말 그대로 시대를 투사한 조감도라 불러도 좋겠다.
영화가 시대를 투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나리>가 흥미로운 건 그리하여 도달하는 시대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나리>는 오늘의 미국을 말한다. 정확히는 오늘의 미국이 어떤 폐허 위에서 지어졌는지, 지금의 미국이 왜 분열하는지, 누군가의 삶이 어떻게 쓰레기가 되어가는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그것이 애초에 영화의 목적이 아니었을지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 목적과 결과 사이의 괴리. 혹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거리. <미나리>는 수신자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는 영화다. 경험을 이야기로 바꾸기 위해선 딱 세개의 점이 필요하다. 시작점과 끝점, 그리고 흔히 절정이라고 말하는 중심점. 이 글에서는 세개의 점, 세 가지 장면을 통해 시선의 주체를 가늠해보려 한다.
파국의 기원, 아메리칸드림의 해체
제이콥(스티븐 연)과 모니카(한예리)가 아칸소에 당도하는 첫 장면부터 영화는 분리된 시선을 드러낸다. 인적이 없는 광활한 땅은 제이콥에겐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이고,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이 걱정되는 모니카에겐 불안이며, 어린 데이빗(앨런 김)에겐 아직 아무런 사건도 아니다. 이주하는 차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과 감정을 한 장면에 담아내면서도 영화가 평등하게 유지하는 것은 넓고 푸른 초원, 자연의 이미지다. 이것은 1980년대 시골 풍경인 동시에 미국이 건국된 이후부터 무수히 반복해온 이미지, 개척의 첫삽에 관한 풍경이다.
감독이 직접 언급하기도 했지만 <미나리>는 서부극의 영향을 이어받았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이 영화의 등뼈는 그야말로 초기 서부극의 현재적 재현이다. 아무것도 없는 미지의 땅에 정착하여 터전을 꾸리는 이야기. 그렇게 영화는 적대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생략된) 탓에 (현실에선 성립하기 힘든) 일종의 무균지대를 형성한다.
제이콥 가족의 정체성은 두개의 카테고리 아래 놓인다. 이민자, 그리고 농부다. 표면적으로 <미나리>는 아시아계 이주민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겠지만 영화에서 이민자로서의 갈등은 사실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 아칸소 지역 주민들과 직접적인 갈등을 겪거나 문화 차이로 주류 사회로부터 밀려나는 순간은 적어도 직접 재현되지 않는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왔고, 모종의 이유로 실패한 것으로 에둘러 정황이 제시될 뿐이다.
그 결과 데이빗 가족은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최대한 거리를 두고 1980년이라는 시대적 좌표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스스로 고립된 가족은 아무도 없는 자연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결혼 피로연>(1993)처럼 이민의 기억을 다루는 영화들이 흔히 마주하는 문화적인 갈등으로부터 격리를 선택한다. 대신 이들에게 주어진 건 첫삽을 든 개척민으로서의 도전과 고난이다.
첫 번째 결정적 장면으로 제이콥이 직접 우물을 파는 순간을 꼽겠다. 제이콥은 수맥을 찾아주는 사람을 믿지 않고, 정확히는 그 비용을 아까워하면서 스스로 물길을 찾는다. 1980년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 장면이 왜 필요했을까. 거슬러 올라가 제이콥은 왜 마지막 희망으로 농사를 택했나. 당시 미국의 가난한 소농민이 진짜로 그랬다든지, 감독의 실제 경험에 근거했다는 이유들은 잠시 미뤄두자. 주목해야 할 것은 왜 하필 지금, 그것이 선택되었는지의 문제다. <미나리>가 택한 농민의 삶은 표면적으로 개척 시대의 고난과 향수를 자극한다. 모종의 이유로 마을 커뮤니티 바깥을 배회하는 폴(윌 패튼)과 제이콥이 서로 협력하고 벽을 낮춰가는 과정은 미국의 모든 아웃사이더들에게 적용된다. 요컨대 제이콥 가족의 고군분투는 비단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사건을 환기시키는 촉매라 할 만하다.
우물 찾기에 실패한 제이콥은 수돗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수맥을 찾는 다우징 로드에 의지한다.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걸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모니카가 독실하게 믿는 종교도 마찬가지다. 어머니 순자(윤여정)가 쓰러졌을 때 이들 가족은 어머니를 병원에 오래 모시는 대신 집으로 데려와 종교의 힘에 의지한다. 폴과 공유하는, 일견 광신적인 방식의 믿음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곳까지 몰린 사람들의 처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리하여 제이콥이 농장을 개척하는 과정은 성공한 사람이 한때의 고난을 되돌아보는 회상적인 시선과는 사뭇 거리가 벌어진다. 제이콥이 언젠가 농장 경영에 성공하는지는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관객이 내내 목격하는 것은 제이콥과 가족을 둘러싼 적대적인 환경 그 자체이며 그것은 오늘날 미국의 가난한 소작농의 현실과 정확히 포개진다. <미나리>는 러스트 벨트나 콘 벨트를 이루는 저소득층의 현재를 (단지 인종과 민족이라는 시차를 두고) 고스란히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 <미나리>의 국적을 따지는 건 그다지 생산적인 작업은 아니다. 우문현답으로 정이삭 감독이 말했듯, 혹은 영화의 역사 속 무수한 시네필들이 답하듯 이것은 영화라는 국적 위에 서 있는 공통의 체험이라고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뼈대를 관통하는 중심에 미국영화의 정체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다. 미국영화계가 <미나리>에 대한 호평을 이어가는 것은 비단 현재 트렌드 중 하나인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역사를 쌓아나가는 방식이 철저히 서부극이 쌓아올린 미국의 신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화는 오늘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고 반복되는 불평등, 가난의 되물림 속에서 다시금 철저히 해체된다.
나는 <미나리> 주변에서 피, 석유, 종교라는 미국 신화의 기원을 탐색하고 해체했던 <데어 윌 비 블러드>(2007)의 흔적을 본다. <힐빌리의 노래>(2020)가 미국 저소득층의 트라우마를 개인의 승리로 환원했다면, <미나리>는 (정확히 반대로) 1980년 개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뼘도 나아지지 않은 현재 미국의 초상과 구조적 모순을 투사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나리>가 과거를 아름답게 추억하거나 경외하길 멈추고 기억하기 시작하면서 이뤄낸 성취일지도 모른다.
재난의 멜로드라마와 빈칸의 서사
두 번째 결정적 장면은 이 영화의 엔딩이다. 첫 번째 장면의 수신인이 미국 관객이었다면 두 번째 장면의 수신인은 한국 관객이 아닐까 싶다. <미나리>는 모든 것이 불탔던 밤 이후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설명 없이 제시되는 아빠와 아들이 미나리를 함께 키우는 장면으로 문을 닫는다. 영화의 시작이 서부극과 같은 광야에 한 가족을 던져두는 것이었다면 영화의 끝은 가족의 미래를 관객의 상상 속에 던져놓는다. 제이콥 가족은 미나리를 키우며 잘 살았을까. 제이콥은 결국 농장을 정착시켜 꿈을 이뤘을까. 할머니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여 가족과 끝까지 함께했을까. 알 길이 없다. <미나리>는 사건의 결과를 제시하는 대신 미개척지에서의 정착이라는 한순간을 잘라서 과정에 동참시키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엔딩이 드러낸 빈칸의 서사는 영화가 보편적인 ‘이야기’로 거듭나는 방식을 대표한다.
사회구조적 모순을 충돌시키고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들과 달리 <미나리>는 어디까지나 선의로 감싸인 영화이며 장면과 장면 사이 낭만적 상상이 들어차 있다. 다만 이는 구조를 은폐하는 환상과는 다르다. 굳이 설명하자면 각자의 경험에 근거하여 빈칸을 메우는 작업에 가깝다. <미나리>는 한 가족이 겪는 파란만장한 불행들을 인과관계로 강력하게 결속하는 대신 많은 공백을 남겨두고 몇개의 점을 찍어나간다. 가령 제이콥과 모니카가 대도시에서 겪었던 일, 두 사람이 한국을 탈출하고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유, 순자가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인물들의 사연 대부분이 설명되지 않는다. 바로 이 빈칸이야말로 <미나리>를 보편타당한 ‘이야기’로 거듭나게 하는 비결이다.
느슨한 서사와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 사연들은 관객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각기 다른 상상을 유발시킨다. 서부극을 기초로 한 미국영화의 맥락에선 오늘날 아메리칸드림의 해체를 목격할 것이고, 이민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한 사실로서 영화를 마주할 것이다. 한국 관객은 대체로 가족의 끈끈함과 역경을 딛고 뭉치는 과정에 집중하는 듯 보인다. 요컨대 저 멀리 타국에서 일어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바꾸는, 화자의 거리를 좁히는 비결은 다름 아닌 멜로드라마적인 화술에 있다.
멜로드라마의 요체는 역경의 돌파(혹은 좌절)이며 진짜 주인공은 인물이 아닌 재난 그 자체다. 제이콥 가족에겐 세 차례의 재난이 찾아온다. 첫째는 폭풍우 치던 날 밤, 제이콥과 모니카의 격렬한 다툼이다. 트레일러가 날아가고 집이 무너질 것 같은 그날의 기억은 아이들에겐 자연재해나 다름없고 영화는 폭풍의 힘을 빌려 아이들이 느꼈을 공포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첫 번째 위기는 할머니가 미국에 오는 것으로 봉합된다. 두 번째 위기는 할머니의 뇌졸중이다. 이는 달빛 비추는 밤의 마법 같은 순간을 지나 손자 데이빗의 심장 질환이 치유되는 것으로 봉합된다.
물론 논리적 인과에 따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미나리>는 경험담을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자로 잰 듯 정확하게 하나의 행복과 하나의 불행을 쇠사슬처럼 연결시켜나간다. 여기서 심리적으로 보상받는 것은 이들 가족이라기보다는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소망일 것이다. 최후의 위기는 이제 겨우 희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던 농작물과 창고가 불타면서 일어난다. 할머니의 실수로 모든 것이 사라졌던 밤까지, 이 영화의 재난은 마치 파도처럼 밀어닥친다. 그 재난이 봉합되는 과정 역시 숙제처럼 제시되고 끝내 가족이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한다.
바꿔 말하자면 재난과 위기는 이들이 가족으로 뭉치기 위해 필요한 도구다. 이 모든 역경은 드라마적으로는 어쩌면 온 식구가 거실에서 함께 몸을 부대끼며 자는 밤, 이 한장의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실상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고, 관객은 그날 밤 마루 옆 한구석에서 동침하며 심리적으로 밀착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영화의 마침표는 조금 더 나아간 뒤에 찍힌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을 보태지 않는 딱 하나의 점.
이 장면을 통해 <미나리>는 극화된 이야기에서 다시금 각자의 기억과 현실 속으로 파고든다. 누군가는 오늘날 미국이 쌓아올린 카드의 집, 그 파국의 기원을 발견할 것이고 누군가는 낯선 땅에서도 끝내 버텨낸 가족의 의미와 온기를 목격할 것이다. 해결할 수 없는 사연(제이콥의 은행 대출이나 할머니의 병원비 문제 등)을 생략해버린 <미나리>의 선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과거의 상처를 회복하는 낭만과 현재로 이어지는 모순을 고발하는 서늘함 사이, 빈자리를 무엇으로 메울지가 당신이 선 자리를 증명한다. 길은 그렇게 관객의 위치와 경험, 목적에 따라서 어느 순간 갈라진다.
닫힌 서사를 해방하는 영화의 맨살
동시에 모든 길은 다시 하나로, 그러니까 영화로 연결된다. 역설적이지만 길이 갈라져 나왔기에 원래 하나였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미나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나를 사로잡은 단 하나의 의문은 ‘이토록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이야기가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였다. 답에 도달하고자 관객성, 그러니까 이야기의 도착지에서부터 거꾸로 되짚어 가보았다. 하지만 거슬러 가보니 결국 길은 하나, 영화다. 마지막 결정적인 장면을 통해 그 길에 이름을 붙여보려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나리>는 우리가 과거라는 이름으로 경외하고 그리워하고 포장했던 것들, 이른바 노스탤지어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 후 현재를 투영한 ‘이야기’로 기억시킴으로써 보편타당한 드라마이자 모두의 체험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 있다. 매우 영리하고 합리적이며 세련된 방식이다. 하지만 이 모든 합리를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결국 구조와 언어를 초과하는 몇몇 장면들이다. 날카롭게 꽂혀 가슴을 헤집는, 의도를 초과하는 어떤 순간들.
서사적, 논리적으로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꼽자면 어둠을 살라 먹으며 불타는 창고와 이후 거실에 모인 가족들이 은은한 달빛을 이불 삼아 단잠에 빠진 순간일 것이다. 손자 데이빗과 할머니가 부둥켜안고 서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던 밤을 꼽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게 가장 곤란했던 장면은 모니카와 제이콥이 식료품 가게 앞에서 이별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한 모니카가 제이콥을 바라보는 표정은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 라고밖에 형용할 수 없다. 한때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고자 했던 파트너에 대한 절망, 지나온 실패에 대한 회한, 여전히 남아 있는 애잔함과 애정,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가족에 대한 죄책감 등 몇 가지 단어로 포획을 시도하는 순간 스크린의 얇은 막까지 녹여버릴 듯한 들끓는 정념이 날아가버릴 것 같다.
모니카의 표정에는 영화가 2시간 내내 들려주고 보여준 것 이상의 인생, 지나온 시간과 불확실한 미래가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장면들은 <미나리> 곳곳에서 발견된다. 할머니 순자의 살짝 굽은 등과 목이 멘 듯 토해내는 한마디, “아이고, 우리 엄마…”. 닫힌 서사를 해방하는 영화의 맨살, 여기에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윌라 캐더의 문구를 다시 빌리자면, 우리는 이렇게 의지와 의도를 초과하는 장면들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든, 말로는 전달이 불가능한 그 소중한 과거를 함께 소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