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복수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에 관한 글에서 한번 이야기했으니 이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두 가지만 추가하기로 하자. 하나, 일단 장르가 형성되면 작품이 이 틀에서 벗어나기가 극도로 힘들다는 것. 둘, 관객은 이 소재를 다룬 모든 영화를 장르의 틀 안에 넣어보게 된다는 것.
에메랄드 페넬의 <프라미싱 영 우먼>의 이야기를 맺는 후반부도 이 영화가 강간복수극이고 관객이 이 장르의 규칙 안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장르가 고정된 상태에서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겨우 셋이다. 하나, 주인공은 앞에 선언한 복수에 성공한다. 둘,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다. 셋, 주인공은 복수에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성공했다.
영화 후반의 서스펜스는 영화가 이들 중 어느 것을 선택했을지 관객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한다. 관객은 1번의 가능성이 사라진 뒤로는 3번이길 바라지만 2번일 가능성은 의외로 높다. 수많은 영화들이 1번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야기를 끌어가다 2번으로 빠지면서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려 하거나, 그냥 이를 통해 관객의 불쾌함을 자극하려 하기 때문이다. 모든 장르영화는 이전 작품들의 존재를 이용한다. <프라미싱 영 우먼>의 힘의 상당 부분은 이 작품 이전에 나온 수많은 영화에 대한 기억에 의존한다. 이 안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선택을 하려 해도 기존 영화와의 비교를 통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도입부는 후반보다 정교하고 덜 전형적이다. 아무 정보 없이 극장에 들어온 관객은 이 영화가 강간복수극 장르의 영화라는 것을 알아차릴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장르를 인지하고 들어온 관객도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몇 십분은 기다려야 한다. 이 길을 통해 이 장르로 들어간 영화는 처음이거나 극히 드물다.
도입부는 조디 포스터에게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피고인>스러워 보인다. 클럽에서 놀던 남자들이 만취되어 반쯤 정신이 없는 것 같은 젊은 여자를 본다. 그들 중 한명이 여자를 집으로 데려간다. 단지 두 가지가 다르다. 일단 영화는 이 상황을 애매한 회색인 것처럼 그린다. 남자는 반쯤 인사불성인 여자를 자기 침대로 끌어들이면서도 자신을 <피고인>의 강간범과 같은 악당들로부터 분리시킨다. (이 남자를 연기한 배우가 안전한 남자친구 이미지로 익숙한 애덤 브로디라는 사실을 덧붙여야겠다.) 둘째, 그 여자는 결정적인 순간 멀쩡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묻는다.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장래 유망한 젊은 여성’은 왜 보호하지 않았나
영화가 조금 더 진행되면 우리는 이날 밤의 소동이 주인공 캐시(카산드라) 토머스의 일상임을 알게 된다. 친구의 카페에서 일하는 의대 중퇴생인 캐시는 밤마다 클럽에서 만취한 척 연기하다가 남자가 자신을 끌어들이면 자신이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다. 남자는 그 순간 자신이 있는 곳이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지점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공포에 질린다.
이 짧은 연극은 약간의 호러와 반전을 곁들인 공익광고 또는 교육영화처럼 보인다. “네가 지금 아무 죄의식 없이 저지르려 했던 것은 강간이야.” 단지 그 교육 대상인 남자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이들의 우선순위 리스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남자(promising young man)인 자신의 인생을 망치려고 하는 이 미친 여자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다. 이들은 이 여자가 자신의 안전지대를 파괴했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한다.
이후, 관객은 캐시의 단짝 친구 니나가 의대 시절 성폭행당했고 대학 당국이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캐시는 죽은 친구의 복수를 하려 하고 최종 목표는 결혼을 앞둔 강간범인 알렉산더 먼로다. 사연을 알게 된 관객은 강간복수극의 전통에 따라 캐시가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이 남자를 처단하길 기다리게 된다.
먼로의 처벌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남자를 처벌하는 것은 캐시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다. 니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강간범뿐만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강간범이라고 해도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을 다닐 젊은 남자의 앞길을 막는 방해물을 치우는 걸 당연히 여기는 시스템 전체가 캐시의 복수 대상이다. 하지만 안개처럼 넓게 퍼져 있는 이 적수와 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시스템 속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너무나도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프라미싱 영 우먼>이 종종 거칠고 단순해 보이는 것은 고상한 서사 예술과 반대의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위대하고 훌륭한 예술 작품은 아둔한 대중이 단순한 흑백으로 보는 세상의 다양성과 복잡함과 입체성을 보여준다. 아마 강간 사건이 일어난 당시 니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입장과 자기만의 복잡한 삶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 위대하고 고상한 서사 예술의 소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캐시와 관객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들이 니나가 강간당하고 죽을 때까지 모두 가해자였고 유죄였다는 것이다. 캐시는 뒤늦게 상황의 복잡성과 애매함을 항변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단순하고 명쾌한 사실을 가르친다. 그리고 캐시의 교육을 받고 나면 상황은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복잡하지도 않다. 이들은 학교 내 강간 사건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넘긴 뒤 잊었고, ‘장래 유망한 젊은 남자’를 보호하는 걸 당연히 여겼으며, 그 과정 중 피해자인 ‘장래 유망한 젊은 여성’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는 위에서 상상한 가상의 위대한 예술 작품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설명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위대한 예술 작품’의 위대함과 복잡성을 따르지 못하는 얄팍하고 천박한 존재이고 이런 폭로를 당해도 싸기 때문에. 캐시의 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그나마 남아 있었던 것 같은 회색도 더 명쾌한 흑백으로 분리된다.
안전한 세상을 붕괴시키려는 노력
이 교육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 캐시는 미치광이, 괴물이 되어야 한다. 영화의 시대배경은 미투 운동 이후이고 이 영화 속 사람들 역시 그 변화를 감지하고 있지만 여전히 상식적인 설득은 불가능하다. 캐시는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이중 일부는 도덕적으로 아슬아슬하다. 하지만 캐시를 괴물로 보는 사람들에게 이 도덕적 문제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캐시는 비윤리적일 수도 있는 일을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사는 안전한 세상을 붕괴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괴물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프라미싱 영 우먼>은 장르 전통에 따른 거의 완벽한 결말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는 통쾌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형식적인 결말은 영화의 불편함을 완벽하게 지우지는 않는다. 강간범은 처벌되겠지만 캐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슷비슷한 남자들을 보호하고 대충 넘기려는 시스템의 무감각함은 여전히 남아 있고, 장르 형식을 충실히 따르는 결말은 오히려 이 여정을 미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