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마음에 죽음이 쌓여간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모든 죽음이 쌓일 수는 없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죽음이 착실히 쌓여간다. 나는 밀려드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나의 한톨 목소리가 그 무수한 죽음의 의미를 호도하거나 왜곡하거나 대상화할까봐 어지럽다. 죽지 않아도 되었을 사람들. 국가만 아니었다면, 혐오만 아니었다면, 빈곤만 아니었다면, 전쟁만 아니었다면, 어쩌면 죽지 않고 살아갔을 사람들.
고 변희수 하사의 죽음 앞에서 그녀가 보여주었던 당당함을 떠올렸다. 그녀가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고 세상 앞에 담대했던 사람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마주해야 했던 한심한 일들을 생각했다. 도대체 그가 그녀가 된 것이 뭐가 그리 문제여서, 뭐가 그렇게도 ‘심신장애’여서 강제 전역을 시켜야 했던 것일까. 도대체 뭐가 문제여서. 그녀가 갑자기 국가를 지킬 수 없는 사람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성별이 국가를 지키는 데에 무슨 기준이 되길래. “성별 정체성을 떠나, 제가 이 나라를 지키는 훌륭한 군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녀의 말은 “퀴어 축제를 보지 않을 권리”나 “차별금지법은 시기상조” 같은 기만적인 말을 깨부수는 존엄의 언어였다.
타지에서도 낯설지 않은 투쟁이 이어진다. 지난 몇주간 검색창에 ‘미얀마’라고 치고 또 쳤다. 하루가 다르게 상황이 변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사망자가 50여명이 넘어갔고, 그중에는 아동도 포함되어 있다. 군이 시민을 조준 사격하고, 구급자에 총을 난사하고, 경찰의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의 시신을 도굴해간다.
나는 망연한 마음으로 기사를 읽는다. 어떻게 이런 역사는 다가오고 또 반복되는 것일까. 5·18기념재단에서 미얀마 민주항쟁 긴급 간담회를 개최한 것을 보며, 그러니까 죽음의 반복을 바라보며 몇달 전 많은 사람들을 슬픔과 충격에 잠기게 했던 정인이의 죽음을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정인이의 죽음을 애도하고 분노로 들끓고 있을 때, 그보다도 몇달 전에 읽었던 <아동학대에 관한 뒤늦은 기록>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미 죽어간 아이들과 또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 이미 죽은 사람들과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죽고 또 죽는 사람들. 죽고 자꾸만 죽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이런 지면이나 빌려 애도를 표하고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여기저기 넣어가며 가슴이나 치는 시민밖에 못 된다. 죽음을 마음에 쌓고 쌓아가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른 채 충혈된 눈이나 뜨고. 나의 조악한 글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몰라도 어쨌든 나는 계속 쌓을 거라고, 죽음을 마음에 쌓고 또 쌓을 거라고, 그리고 잘 살아 있는 주제에 그 무게에 눌리는 오만한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겨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밖에는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