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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 맨> O.S.T
2002-05-16

도시의 오버그라운드

스파이더 맨이 높은 망루 비슷한 곳에 새처럼 홀로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시가 보인다. 화려한 불빛들. 이때 스파이더 맨은 왠지 우울하고 외롭다. 저 밑에서 개미들처럼 우글거리는 그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아예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는 현실에서는 더 우울한, 매력도 없고 용기도 없는 피터 파커이다.

‘누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사실만큼 도시를 잘 규정하는 것이 또 있을까. <스파이더 맨>의 매력은 거기서부터 나온다. 빌딩들이 없었다면 스파이더 맨의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거꾸로 매달린다. 천길 낭떠러지 같은 고층 빌딩이 아니라면 거꾸로 매달려봐야 무슨 재미란 말인가. 그래서 이 캐릭터가 흥미롭다. 그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다. 다만 그만의 방식으로 도시를 살아내고 있는 외로운 한명의 사람, 아니 스파이더 맨일 뿐이다. 도시를 자기 식으로 누비는 그. 빌딩은 그의 숲이다.

그와 같은 캐릭터가 놀 가장 적당한 곳은 어디일까? 뉴욕이다. 그런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곳은? 할리우드. 음악은? 역시 할리우드표. 대니 앨프먼이 음악을 맡았다. 음악만으로 친다면, <베트맨>의 재판이다. 대니 앨프먼 특유의 기괴함이 여전히 진한 개성을 발휘하긴 하지만, 팀 버튼하고 어울릴 때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대니 앨프먼은 상투형들에 좀더 충실하다. 그렇다고 잘 못했다는 건 아니다. <다크맨> <아미 오브 다크니스> 등에서 샘 레이미와도 호흡을 같이한 바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어느 정도는 죽이 잘 맞는다. 선곡도 재미가 없지는 않다. 파티장의 메이시 그레이는 여유있게 이죽거리며 그루브를 발휘한다. 다만 <베트맨>에 등장하는 프린스의 음악이 대니 앨프먼 스코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면, <스파이더 맨>의 메이시 그레이는 그렇지 않다.

O.S.T 앨범은 전형적인 할리우드영화 O.S.T다. 미국 록들로 일관한다. ‘본토 록’이 아니라 미국 록 말이다. 미국 록은 이제 듣기가 좀 지겹다. 말끔하긴 하나 뻔한 뭔가를 끊임없이 동어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래도 재미난 트랙들이 몇개 있다. 옛날, <스파이더 맨>의 만화 주제가가 모노로 실려 있다. 에어로스미스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들한테는 짤없이 ‘미국적’으로 스트레이트하게 가는 시원함이 있다. 그러나 조금 더 언더그라운드로 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O.S.T다. 왜 언더그라운드냐고? 시도 때도 없이? 수십억달러를 들인 블록버스터에서? 그래도 스파이더 맨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언더그라운드가 더 어울린다; 손목에서 줄을 뿜어내며 빌딩 사이를 타잔처럼 비행하는 그를 보면 보도 블록을 누비는 스케이트 보더가 떠오른다. 도시는 그를 소외시켰지만 그는 도시를 자기에 맞게 다시 변형시킨다. 스파이더 맨을 비롯한, 도시를 사는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작은 ‘변형’에 의해, 도시는 도시적으로 기능하면서 억압하길 일시적으로 중지한다. 그런 그의 도시는 도시의 중심에서 보면 언더그라운드가 되는 것이다. 어버니즘(Urbanism)의 핵심이 그것인데, 음악이 그런 점을 더 살렸어야 옳았다. 물론 한국 변방에서 이런 말을 해봐야 <스파이더 맨>은 들으러 오지 않는다. 그는 뉴욕에서 바쁘다. 빌딩 숲을 누비다가 끝나는 멋진 마지막 장면에서 펄럭이던 성조기가 문득 나를 외롭게 한다. 쌍둥이빌딩이 폭파되어 개봉이 1년간 늦추어졌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