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이상희)은 “다 바로잡으려 온” 여자다. 그는 딸 설(김시하)을 쌍둥이 형제 진우(강길우)에게 맡겨놓고 연락을 끊었다 다시 찾아와 설의 엄마가 되겠다고 선언한다. 자식에게 평범한 삶을 누리게 해주고 싶다고, 살아보니 그 평범함이 참 중요한 것 같다고 말하며 평범치 않은 길을 걷는 가족을 나무란다.

그러나 은영은 준비가 안돼 있다. 아이와 뛰노는 들판의 양들에게 다가서지도, 아이에게 능숙히 음식을 먹여주지도 못한다. 요의를 참지 못한 아이가 새벽잠을 깨우는 상황도 낯설기만 하다. 그럼에도 은영은 설이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만큼은 그 곁에 있어주고자 몸을 일으킨다. 영화가 끝나기까지 딱 한뼘의 성장을 해내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 이상희는 이야기 너머에 있을 인물의 삶을 생각했다. 은영이 은영만의 엄마다움으로 딸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영화 시작 30분 만에 <정말 먼 곳>에 나타난다. 짙은 감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등장해 마치 탐정처럼 느껴졌다.

=나 때문에 장르가 자꾸 왜곡되는 것 같다. (웃음) 의상 컨셉은 명확했다. 감독님이 은영이 외지인이 줄 수 있는 이질감을 풍길 수 있는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의상팀이 의상을 준비했고, 선글라스 끼는 것만 내가 아이디어를 냈다. 선글라스가 과해 보이지 않고 적당한 이질감을 주더라.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은영은 진우에게 결혼을 했고, 돈을 모아 가게를 차렸다고 간략히만 소식을 전한다. 인물이 어떤 시절을 지나왔을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봤나.

=은영이 갑자기 임신을 하게 됐는데 아이의 아빠가 은영을 떠났고, 혼자서 어떻게든 아이를 책임지려고 애쓰던 은영이 진우에게 아이를 맡기고 돈을 벌러 갔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자리도 잡게 되어 아이를 찾으러 온 건데, 이제 와서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자기중심적이지 않나. 감독님이 은영이 영화 말미에서야 딸아이의 입장에 대해서도 조금 생각해보게 되는, 딱 그 정도의 성장을 하는 캐릭터였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는 은영의 엄마다운 모습이 좀더 보였으면 했는데, 감독님은 은영의 미숙함이 좋다는 거다. 같이 고민하며 의견을 조율해나갔다.

-신과 신 사이의 생략도 흥미롭다. 진우와 대화를 마친 은영이 눈물을 훔치며 차에 들어가버리는데, 다음 신이 진우, 은영, 현민, 설의 저녁 식사 장면이다.

=원래 대본에는 중간 장면이 있었고, 촬영도 실제로 했다. 은영이 차를 타고 일단 가는데, 꼬불꼬불한 산길에서 차가 퍼진다. 차를 고칠 수도 없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니 은영이 진우에게 연락해서 은영의 차는 견인시키고, 두 사람이 진우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거다. 편집 과정에서 덜어졌다.

-크고 작은 생략들이 이 조용한 여자의 사연과 심정을 더 궁금하게 만든다.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배우의 입장에서는 어땠나.

=은영이라는 인물이 잔잔하던 호숫가에 던져진 돌처럼, 상황을 일렁이게 하는 기운을 뿜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 이야기를 너무 좋아하고 지지했다. 한국에서 본 적 없는 종류의 영화가 나올 것 같았고 그래서 함께하고 싶었다. 진우와 현민이 영화에서 더 잘 보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내가 그 옆에서 영화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출발했다.

-관객으로서 지난해 12월에는 <겨울밤에>의 춘천에서, 3월에는 <정말 먼 곳>의 화천에서 이상희 배우를 보게 되어 더 반갑게 느껴졌다.

=강원도의 딸이 되어가고 있다. 강원문화재단에서 나에게 홍보대사까지는 아니고 명예 도민, 명예 딸 이런 타이틀 하나 주면 어떨까 싶다. (웃음)

-사실 이상희 배우에게 팔도의 필모그래피가 존재한다. <국도극장>에선 전라도, <니나 내나>에서는 부산, <우리 지금 만나>에서는 북한 사투리로 연기했다. 평소 본인을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타입의 배우라고 설명하는데, 말씨 자체를 바꿔야 할 때는 어떻게 대응하나.

=말투는 녹음본을 듣고 연습하는 것이다 보니 최대한 흉내내려고 노력한다. 울산 출신이라 경상도 사투리를 할 때는 무리가 없는데 다른 지역의 경우 애드리브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그만큼 다양한 공간, 직업, 생활상을 가진 인물을 연기해왔는데 볼 때마다 능수능란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드라마 <검사내전> 중 그게 정점을 찍은 신이 있었다. 입원한 상태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을 상대해야 하는 신이었는데, 누운 채로 현실의 대사를 뱉고 침대 밖에 서서 마음의 소리를 뱉는 걸 오가지 않나. 에너지의 완급 조절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인물에게 그대로 이입하게 되더라.

=편집된 걸 봐서 그렇다. (웃음) 나는 연출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는 배우인 것 같다. 그 장면도 대본상에서는 침대에서 누웠다, 앉았다 하며 찍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게 힘들 것 같다고 얘기하자 조감독님이 아예 침대 밖으로 나와서 연기하는 방향으로 제안해주셔서 따른 거다. 항상 연출적인 도움을 많이 받고 연기한다. 보기보다 현장에서 많이 혼난다. (웃음)

-그렇다면 지금은 배우로서 무엇에 목말라 있나.

=그저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자주 할 뿐이다. 진짜 이 인물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존재할까. <정말 먼 곳> 같은 경우 장례식장 신을 찍을 때 진짜 은영이라면 이 상황에서 진우를 어떻게 대할까, 어떤 말을 할까 계속 생각하는 거다.

-차기작은 영화 <정가네 목장>과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이다.

=<정말 먼 곳>에 양이 있다면 <정가네 목장>에는 소가 있다. 큰오빠 류승룡 선배, 작은오빠 박해준 선배와 잘 찍고 인사드리고 싶다. <지금 우리 학교는>은 엊그제 후시녹음을 하고 왔는데, 아마 하반기에는 공개되지 않을까. 담임선생 역을 맡았는데, 학생 역의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잘했다. 이 작품이 한국 좀비물을 씹어먹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