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레베카>와 영화 <레베카>의 내용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레베카>를 처음 보던 날, 나는 시작부터 하염없이 졸았다. 가난한 여자와 부자 남자의 러브 스토리라니, 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많이 좋아한다. 나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과 관점이라고 믿고, 오래된 소재와 클리셰는 역사를 뚫고 살아남은 귀한 재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레베카>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지금과 조금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꽤 오만한 부분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참을성도 별로 없었다. 내가 읽고 싶은 게 없고, 보고 싶은 게 없으면 쉽게 흥미를 잃었다. 그런건 별로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 때문에 졸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중에 이 영화를 다시 보고서 무척 후회했다. 여자주인공이 호텔을 떠나기 직전, ‘맥심’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갖은 수고를 다하는 그 긴박한 명장면을 보는 데까지만 버텼다면! 나는 꽤 많은 것들을 정말 일찌 감치 배웠을 텐데. 아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그 좋은 장면을 보고서도 나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수 있다. 원래 어리석음이라는 게 그런 거니까. 그래도 다행히 중간에 눈을 번쩍 떴을 때, 나는 단 한가지만큼은 눈치챘다. 바로, 이 이야기가 매우 기이하다는 것. 웬 시커먼 옷을 입은 여자가 주인공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더 머물 이유가 없어요. 더 살 이유도 없잖아요? 내려다보세요. 아주 쉬워요. 그렇지 않나요? 자 어서, 뛰어내려요.”
원작인 대프니 듀 모리에의 <레베카>에서도 댄버스 부인은 매우 섬뜩하다. 그녀는 지금의 ‘드윈터 부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전에 모셨던 ‘레베카 드윈터’만이 진정한 안주인이다. 그래서 댄버스 부인은 ‘드윈터 부인’을 끝없이 가스라이팅한다. 당신에게는 이 집 안주인으로서 자격이 없어요. 레베카는 정말 아름다웠죠. 그녀의 취향은 완벽했어요. 그녀는 용감하고 남자보다 더 대단한 여성이었죠. 모든 남성을 쥐락펴락했어요. 당신은요? 당신에게는 어떤 자랑거리가 있죠? 그게 없다면 이 집을 다스릴 자격이 없어요. 그리고 그 때문에 ‘맥심’은 당신을 떠나게 될 겁니다. 그녀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레베카 드윈터’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맥심과 ‘드윈터 부인’의 러브 스토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드윈터 부인’과 ‘레베카’ 그리고 ‘댄버스 부인’의 삼각관계를 아주 지독하게 다루고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름조차 없는 우리의 여주인공. ‘드윈터 부인’은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엔 너무 나약하다. 맥심을 사랑하지만, 맥심이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저택으로 돌아온 후 그는 놀라울 정도로 아내에게 무심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교묘하게 깔린 전제가 있다. 바로 이 소설은 1인칭 화자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
대프니 듀 모리에는 이 시점을 정말 완벽하게 구사한다. 내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지만, (직접 듣지 않는 이상) 타인의 마음은 절대 알 수 없다. 사각지대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혼자서 무엇을 하는가. 댄버스 부인은 서쪽 방에 왜 머무는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드윈터 부인’의 망상만 부풀어오를 뿐이다. 덕분에 오해가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두려움도 쌓인다. 맥심의 진심을 알 수 없는 탓에 그녀는 댄버스 부인의 가스라이팅에 계속 무너진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댄버스 부인의 속삭임, “뛰어내려요” 그 말에 흔들린다.
하지만 그 순간, 반전이 찾아온다.
영화는 원작보다 맥심의 비중이 조금 더 큰 것 같다. 댄버스 부인의 활약이 적은 것 같아 조금 안타깝지만, 그만큼 신비로운 느낌이 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나는 둘 다 좋아한다.) 그리고 영화의 맥심은 소설에서보다 조금 더 이해할 만한 인물로 느껴진다. 그건 아무래도 ‘맥심’이 더이상 ‘드윈터 부인’의 시각에만 갇혀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말과 행동을 직접 목격할 수 있다. 그건 다른 남자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원작보다 남자주인공들의 활약이 조금 많다는 느낌도 든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뭐랄까, 상당히… 볼썽사납다.
“레베카는 병에 걸렸어! 자살할 생각이었던 거야! 맥심은 무죄야!”
이런 황당한 결론이라니. 아니, 죽어가는 사람이었으니까 살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이 성립이 안된다고? 그리고 레베카가 살인을 유도했으니까 당연히 무죄가 된다고? 그게 어떻게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이 억지는 당연히 원작에도 실려 있다. 그리고 이 관점으로 ‘이야기’는 맥심이라는 캐릭터를 아주 철저하게 보호한다.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여성상인 레베카는 바다에 묻히고, 그녀를 처단한 맥심은 살아 남는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심지어 드윈터 부인도 그렇다. 오히려 그녀는 헌신적으로 맥심을 보호한다. 그녀는 이 사건으로 성장한다. 남편이 죄를 지었다는 걸 아는 순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아는 순간, 자존감을 회복하고 진정한 드윈터 부인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를 지켜낸다.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이런 보수적인 결말은 아마 이 소설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기억하곤 한다. 바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소설만의 결말이다.
영화에서는 저택이 무너지면서 어떤 ‘악’이 사라지는 것처럼 끝났지만, 소설에서의 결말은 시작과 다시 만난다. 이야기를 회상한 ‘현재’로 돌아온다. 맥심과 드윈터 부인, 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저택을 떠나 호텔을 전전하며 살고 있다. 비록 의심에서는 벗어났지만, 죄의식에서는 탈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윈터 부인은 끊임없이 괜찮다고 되새기지만, 그녀는 과거에 묶여 있다. 레베카를 잊지 못한다. 그건, 남편이 전 부인을 죽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공범이라는 사실도 기억하는 것이다. 그녀는 맥심을 사랑한다. 그렇게 말한다. 믿는다. 이런 그녀에게 대프니 듀 모리에는 끝까지 이름을 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