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떤 일이든 정성껏 긴 시간 들여다보면 그 일의 모든 국면이 삶의 은유가 된다. 그래서 바둑은 인생과 같고, 낚시는 인생과 같고, 야구와 축구도 인생과 같으며, 요리도 인생과 같다. 김정연의 만화 <이세린 가이드>를 보면 음식 모형을 만드는 일 역시 인생과 같구나 싶어진다. 게다가 <이세린 가이드>를 읽으면, 혹시 김정연 작가가 주인공 이세린처럼 음식 모형 만드는 일을 했거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이렇게 모형을 만드는 직업에 대해서, 그 일이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이고 선명한 상념들에 대해 알고 있을까. 김정연 작가의 전작인 <혼자를 만드는 법> 역시 그랬다. 엄연히 픽션이지만 김정연 작가의 에세이처럼 받아들이게 만드는. 음식 모형 제작자라는 직업은 낯설어도, 혼자 일하고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머릿속 상념은 많은 이들에게 속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목차 대신 ‘차림표’라고 적힌 페이지 안내에는 에피소드 제목이 모두 음식 제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캘리포니아 롤, 와플과 번데기, 비빔밥, 배추김치, 곶감과 굴비, 떡국과 미역국, 매운라면, 녹차크림 바움쿠헨 같은 식이다. 각 챕터에서는 이세린이 차림표의 메뉴를 작업한다. 해당 메뉴를 모형으로 만드는 작업 공정이나 유사한 작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이야기가 신묘하게 다른 곳으로 튄다. 예를 들어, 시작은 녹차크림 바움쿠헨에 대해서인데 이세린이 단면을 볼 수 있게 바움쿠헨 모형을 커팅하다가 교과서에서 본 지구 단면도를 떠올린다. 그러다 씨를 제거하지 않은 올리브를 떠올리고, 주머니칼에 대한 이야기로 흐르다가, 어머니가 칼에 대해 한 말을 생각한다. 수석과 칼은 기가 센 사람이 아니면 수집해서는 안된다는 철학을 가진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칼이란, 날이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무딜 때 사람을 다치게 하는 거야. 부지런히 갈아둬야 다치지 않는다”.
전개가 빠르다면 빠르지만, 사실 전부 다 이세린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들이다. 이세린은 많은 칸에서 혼자다. 같은 칸을 나누는 사람들은 거의 회상 속 인물들이다. 혼자, 먹지 못할 음식들을 가능한 한 맛깔나게 만들어가며, 이세린은 눈앞의 모형과 과거의 꿈, 관계, 가족에 대한 생각을 수시로 떠올린다. 아마도 그 모든 순간에 이세린의 눈은 모형에 고정되어 있고 손은 바삐 움직일 것이다. 이세린의 정교한 음식 모형에 대해(나아가 <이세린 가이드>에 대해) 어떤 멋진 해석을 덧붙이든, 이세린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할 것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보내주신 자료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자료는 우리 앞의 생. 그것뿐인데도, 페이지를 아껴가며 읽게 된다. 권말에는 김정연 작가의 후기가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