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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은의 마음이 하는 일] 멋진 할머니의 나날을 그린다는 뜻
오지은(뮤지션) 2021-02-11

일러스트레이션 EEWHA.

어린 소녀였을 때 거울을 보고 미소를 연습한 적이 있다. 때는 90년대 초반, 난 한창 만화에 빠져 있었다. 여주인공이 미소를 지을 때 세상이 환해지고, 배경에 목련이 피어나고, 사람들의 (특히 남자주인공의) 닫혀 있던 마음이 허물어지는 세계관에 흠뻑 빠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여자주인공은 자신에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꼬마 눈에 얼마나 그게 매력적으로 보였는지.

나도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거울을 책상에 놓고 씩 웃어보았다. 아, 이가 8개 드러나야 멋진 웃음이라는데 거울속 이는 6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입을 옆으로 쫙 찢어보았다. 이렇게?이렇게? 그 영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현재 내가 웃을 때 이가 8개 이상 보이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간 세상은 1루멘도 밝아지지 않았고 많이 웃는다고 일이 편하게 풀리지도 않았다. 나는 종종 너무 크게 웃는다는 말을 들었다가 어떨 땐 또 너무 안 웃는다는 말을 들었다. 세상이 밝아지긴커녕 적절한 웃음의 정도를 찾아내기조차 힘들었다.

그다음 빠지게 된 만화는 다무라 유미의 걸작 <바사라>였다. 사라사라는 여자아이가 주인공인데 사라사는 정말 완벽하다. 흠이 없어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사라사가 ‘울면서 달려가는 아이’이기에 더욱 완벽하다. 아름답고 귀엽고 강하고 칼싸움도 잘하고 말도 잘 타고 너그럽고 좋은 건 다 하는 와중에 보살펴주고 싶은 매력까지 가지고 있다니. 그때부터 내 마음속 위인은 사라사였다. 힘든 상황이 있을 때 사라사를 떠올렸다. 친구에게 불만이 생겼을 때 사라사라면 어떻게 했을까? 독서실에 가기 싫을 때 사라사는 어떻게 했을까? 사라사가 주로 하던 것은 전쟁과 사랑과 전쟁 같은 사랑이어서 내 생활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순 없었지만 그럴 때 떠올릴 수 있는 또래 인물이 있다는 것만으로 어딘가 위안이 되었다.

그다음은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때 하루키에게 엄청나게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노파심에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전히 그의 여러 작품을 좋아합니다. 특히 <먼 북소리> 같은 작품). 그의 소설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내게 알쏭달쏭하게 읽혔지만, 수필은 달랐다. 그간 보지 못했던 세련된 동아시아인의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간에 도쿄가 가득했다. 구수하지 않았다. 이것이 쿨이구나. 가장 멋진 포인트는 드문드문 보이는 유머였다. 난 내 일상을 하루키처럼 바라보고 쓰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의 센스는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세라복을 입은 연필>(1994년 한국에서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 제목이다). 지금 보면 이 영감탱이가 무슨 소리 하나 싶지만, 그때는 그게 멋진 유머고 재치였다. 그 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금 쓰는 연필이 세라복을 입은 여자아이로 보인다는 내용인데, 얼마 전까지 교복을 입고 다니던 여자아이 입장에서 그런 기분에 잘 이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의 마음에도 이입을 해야 했던 지난날인걸. 남자주인공에 이입하는 다양한 스킬을 갖추도록 훈련된 나는 쉽게 그의 문체에 적응했다. 그리고 나중에 내 글을 쓰고 깨달았다. 그 옷은 전혀 내 옷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글과 음악을 파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되었고 가끔은 방송에 나가 말도 팔았다. 글과 음악은 원래 어려운 것이라 쳐도 말, 나는 말하는 게 새삼 어려웠다. 티브이를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면 다양한 캐릭터의 사람이 있었다. 거친 사람, 유약한 사람, 똑똑한 사람, 어눌한 사람, 말이 빠른 사람, 느린 사람, 낯가리는 사람, 밝은 사람, 재미있는 사람, 재미없는 사람. 나는 내가 그중 어떤 사람인지 모른 채 방송에 나갔다. 그리고 솔직하게 떠들었다. 재미있고 흥겹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항의를 종종 받았다. 지금 저 시끄럽게 떠드는 여자는 누군가요, 말이 너무 빠르고 듣기 불편하네요 등등. 미디어에 노출될수록 실망을 주니까 출연하지 않는 게 이득일 거란 얘기도 들었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미있으면 장땡 아닌가? 나는 내 동료들과 있을 때처럼 말했을 뿐이다. 세상에, 순진하기도 하지. 나는 당시 세상이 내게 바랐던 역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시끄러운 것도, 엉뚱한 말도, 높은 톤도, 능청도, 나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홍대 출신의 여자 뮤지션은 이러쿵저러쿵해야만 했다. 그 이러쿵저러쿵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범위가 상당히 좁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아, 내가 미디어에서 봐온 다양한 캐릭터들은 다 남자였구나. 나는 내 말투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싫어졌다(물론 제 모습을 좋아해준 분들도 계십니다. 단지 제가 미숙한 비호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가 아닌… 몬주 아시죠?).

그리고 시간은 흘러 흘러, 세상도 조금 바뀌었고 나도 조금 바뀌었다. 나는 내 말투를 그렇게 싫어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기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가끔은 이 노력을 다른 데 쏟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다. 그리고 버릇이 생겼다. 여성이 미디어에서 말을 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그녀가 쓰는 쿠션어, 그녀가 보내고 있는 ‘나는 무해하다’는 전파 발신 같은 것들을 읽게 되었고 그걸 수행하지 않는 여성들에게 붙는 꼬리표 같은 것을 보았다. 앞에도 적었지만 분명 세상은 바뀌고 있다. 하지만 속도는 느리고 우리는 그 세상을 지금 당장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넷플릭스의 다큐 <도시인처럼>을 보았다. 마틴 스코시즈가 찍었고 프랜 레보위츠라는 작가가 주인공이다. 그는 70살 여성이고 뼛속까지 뉴요커이며, 재미있고, 위트 있고, 똑똑하며, 날카롭고, 시니컬하며, 그 모든 것 안에 사랑이 있다.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것을 프랜 레보위츠가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랜 선생님. 단정지어주세요. 비꼬아주세요. 급소를 찔러주세요. 낄낄거려주세요.

나는 어느새 분류상 중년 여성이 되었고 운이 좋다면 할머니가 될 것이다. 멋진 할머니를 떠올리려고 해봤더니 기운이 넘치고, 아름답고, 몸매가 여전히 너무도 훌륭한 제인 폰다가 떠올랐다. 존경하지만… 내 길은 아니다. 메릴 스트립은? 이미 지구인의 레벨을 뛰어넘은 존재다. 하지만 프랜 레보위츠라면?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 구부정한 자세, 불친절한 얼굴 근육과 삐죽 올라간 입꼬리를 떠올리니 마음이 다 편해진다. 이런 종류의 멋짐이라면 마음에 품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앞으로 살면서 몰래 생각하겠지. 이런 상황에서 프랜 레보위츠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고 다양한 롤모델이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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