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y White Season 1989년, 감독 유잔 팔시 출연 도널드 서덜런드 <EBS> 5월18일(토) 밤 10시
“인디영화계에 정착해 눈을 돌리지 말거나 아예 주류에서 확실히 성공할 것.” 이 이야기는 여성영화인이 할리우드영화판에 발을 딛기 얼마나 어려운지 암시한다. 흑인 여성감독인 유잔 팔시는 인디영화계에 있다가 이후 메이저로 옮겨 영화를 만든 경우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덩쿨장미>의 마사 쿨리지, <마돈나의 수잔을 찾아서>의 수잔 세이들만과 같은 길을 밟은 것이다. 흥미롭게도 유잔 팔시의 메이저 진출작은 상업적이지도, 그리고 전혀 온건하지도 않은 영화였다. 남아프리카를 무대로 흑인들과 의식있는 소수 백인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그려내고 있다. <백색의 계절>엔 도널드 서덜런드, 수잔 서랜든 등 할리우드에서 ‘의식있는’ 배우들로 지목되곤 하는 연기자들의 출연도 눈에 띈다.
197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교사인 벤은 가족들과 평화롭게 지낸다. 어느 날 정원사의 아들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들은 구속당한 상태였고, 벤은 아들이 곧 석방될 것이니 문제를 확산시키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럼에도 정원사는 변호사를 고용하는 등 항의를 벌이다가 경찰서장의 부하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와중에 목숨을 잃는다. 정부에선 그가 자살했다는 발표를 하고 벤은 사회적 모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다. 가족들은 벤의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고, 벤은 차츰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백색의 계절>의 도입부는 서늘하다. 학교 교육에 항의하는 흑인 학생들을 향해 경찰은 무차별 발포를 시작한다. 어린아이들의 비명이 들리고, 총탄은 그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판다. 심지어는 도망치는 학생들을 향해서도 방아쇠가 당겨진다.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영화는 어느 백인 남성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그는 처음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아예 둔감하다. 둔감할 수밖에 없는 게 모든 혜택을 다 누렸으며 행복한 가정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씩 이 남자의 의식이 깨어난다. 여느 미스터리영화에서 그러하듯,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감춰졌던 ‘비밀’을 하나씩 들춰보이는 것이다. 고문과 구타, 그리고 정치적 테러에 이르기까지 추잡한 현실을 말이다.
남아공의 암담한 상황에 관한 영화로는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의 <자유의 절규> 등이 있었다. 유진 팔시 감독은 같은 소재를 비슷한 방식으로, 즉 ‘타자’의 관점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플롯을 취하되 약간의 차이를 둔다. 흑인들의 실제 경험을 영화에 녹여낸다는 것이 그렇고, 다른 하나는 가족드라마의 양상을 취한다는 것. 정치적 메시지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않고 드라마의 품새를 갖춰놓은 것이다. 벤은 곧 가족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부인은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딸조차 아버지를 수치스럽게 여긴다. <백색의 계절>의 결말은 희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감독은 주류영화계에서 작업했음에도 인디영화 시절의 비판적인 태도를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후 유잔 팔시 감독이 유럽으로 건너가 다시 할리우드로 복귀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건, 당연한 일 아닐까?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