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개봉영화를 잘 챙겨보지 않고 있지만 <위 워 솔저스>는 내심 개봉을 기다렸던 영화다. 우리 회사에서도 지난해부터 베트남전쟁이 배경인 <슬로우 불릿>이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던 터라, 할리우드에서 만드는 베트남전쟁영화라면 상대하기 두려운 경쟁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의 기존 베트남전쟁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화라면, <슬로우 불릿> 제작은 김새는 기획이 되고 말 텐데…. 솔직히 지레 기가 좀 죽어 있었고 두렵기까지 했다.
개봉 첫 주말 저녁, 잔뜩 긴장하고 <위 워 솔저스>를 보러 갔다. 수입사, 배급사 관계자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다행스럽게’도 너무 재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도했다. 심지어 졸다가 무지막지한 총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기도 했다. 졸아도 볼 건 다 봤고, 조느라고 이야기의 흐름을 놓친 것도 별로 없었는데, 하여튼 재미가 없었다(사실 흐름을 놓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할리우드산 베트남전쟁영화와 별반 달라보이지도 않고, 설사 ‘미국주의’ 색깔을 좀 덜어냈다고 해도 여전히 진부했다. 더욱이 전쟁의 당사자인 베트남군에 대한 묘사만 보더라도 그들의 시각은 별로 달라져 있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할리우드는 베트남전쟁을 참 지겹도록 우려먹는다는 생각만 했다.
나는 우리가 만드는 <슬로우 불릿>은 <위 워 솔저스>나 무수한 할리우드영화와는 달리 새로워야 하고 역사적,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화여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베트남 ‘인민’들과 한국 국민들의 동의를 같이 획득할 수 있는 영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동의는 곧 세기를 건너 포악했던 전쟁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현재성을 담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정성은 영화의 형식과 미학 등을 포괄하는 작품성이나 대중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뭉뚱그려서 쉽게 말하자면,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과 베트콩의 이야기를 제대로 그려내면 당연히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쯤에서, 덜컥 걱정이 앞선다. ‘그럼 <슬로우 불릿>은 얼마나 잘 만드나 두고보자’는 반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슬로우 불릿> 만든다고 소문만 요란하더니 여태껏 가시화된 것도 없고, 아직도 갈 길이 만만치 않은 터라 솔직히 조바심도 난다. 몇몇 지인들도 “제목 따라 슬로우냐”, “패스트 불릿으로 제목부터 바꿔보라”는 농담 섞인 독려 속에서 가볍지 않은 걱정을 내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슬로우 불릿>을 빨리 만드는 것보다 당연히 반듯한 영화로 만드는 것이기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슬로우 불릿>은 지난 4월24일 베트남 문화통신부로부터 현지 촬영허가를 받았으며, 시나리오 수정 작업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머지않아 한국에서 만든 재미있는 베트남전쟁영화 한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