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을 두 종류로 나누자면 단골이 될 수 있는 사람과 단골이 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손님으로 어느 가게를 자주 가서 단골의 자격이 충분해졌더라도 주인이 나를 아는 체를 하는 순간, 그곳을 더는 들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분명 이런 태도가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
과거 일을 예로 들자면 이런 식이다. 예전 집 근처 편의점에서 늘 비슷한 시각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먹었는데 어느 날 직원이 말을 건넸다. “이 아이스크림 맛있죠? 저도 맛있더라고요.” 대충 그렇다고 쑥스러워하며 대답은 하고 나왔지만 그 이후부터는 다시는 거기에 가지 못했다. 이유는 바로 내 존재를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비밀 요원도 아니고, 부끄러운 짓을 하지도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익명의 ‘손님1’이고 싶은데, 한순간 ‘이 근처에 살고, 매일 특정 아이스크림을 비슷한 시간대에 사 먹는 20대 남자’로 특별하게 기억되는 게 당시엔 영 마뜩잖았다.
반대의 경우도 존재한다. 단골이 된 한 팥빙수 집이 그 케이스다. 그 집이 단골이 된 이유는 팥빙수가 맛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인의 무신경한 태도도 한몫했다. 일주일에 한두번 이상은 꼭 갔지만, 주인은 나를 늘 처음 온 손님처럼 대했다. 누군가는 단골손님인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고, 말 한마디 더 건네지 않는 주인을 무심하다고 서운해했을 수도 있지만 스스로 “대도시 깍쟁이”가 되길 원하고 자처하는 나와 궁합이 딱 맞는 가게인 셈이었다.
얼마 전 이사한 친구가 그런 얘기를 했다. 이사한 옆집에 한 할머니와 지적장애를 겪는 나이 든 아들이 사는데, 친구 집에 살던 이전 세입자 말로는 그 할머니가 평소에 음식을 자주 갖다주었다고 한다. 친구 생각으로는 할머니가 그런 이유가 이웃과 잘 지내려는 노인의 붙임성일 수도 있지만 연로한 자신에게 만약 안 좋은일이 생기면 혹시나 이웃에서 바로 알아차려달라는 의도도 있지 않았겠냐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얼마 전 뉴스에서 접했던 발달장애인 아들을 둔 60대 여성의 비극이 떠올랐다. 그녀는 생활고 속에 숨진 뒤 반년 넘게 방치되었는데 주변에서는 아무도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홀로 죽음을 맞이한 그 여성이 평소 옆집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살았더라면 우리는 비교적 일찍 그녀의 죽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예상컨대 난 아마도 이른바 ‘홀로 노인’으로 노년을 맞이하지 않을까. 단골조차 되기를 꺼리는 수줍음 많은, 아니 존재감 없는 노인으로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다행히 전보다는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이 도시에서 이웃과 말을 쉽게 섞는, 마치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역할은 여전히 내겐 영 어색하다. 일상 속에 별말 없이 주인공 대사를 듣고만 있는 엑스트라 역할이 자연스럽다. 다만 이런 무명의 엑스트라들도 고독하게 죽지 않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이 갖춰진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면 무명씨의 너무 큰 희망일까.
*이번 칼럼을 끝으로 ‘이동은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연재를 마칩니다. 이동은 작가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