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라니. 기이한 바이러스가 온 나라를 뒤덮고, 사람이 끊임없이 병들어 죽어나가는데도 ‘새해’가 올 수 있구나. 이래서 ‘세월’을 가리켜 참 ‘속절없고’, ‘가차 없다’고들 하는구나. 지인들에게 새해 인사 문자를 보내려 했을 때 꽤 망설였다. 뭐라고 해야 할까. 코로나19 사태 이후로 메일 끝에 종종 “무탈하게 지내세요” 라고 적긴 했지만 왜인지 입이 썼다. 일단 ‘감염’은 ‘무탈하게 지내고 싶은’ 내 의지와 소망을 전혀 개의치 않는 사태이며, 무엇보다 일신의 무탈을 비는 내 소망이 조금은 ‘보신주의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미 ‘탈’이 났고, ‘탈’이 날 확률이 높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안위를 돌보고 개선하지 않는 이상 ‘무탈’은 그저 요행일 뿐이지 않은가.
‘건강하세요’라는 말도 버석거리기는 마찬가지다. 애초에 형용사를 명령형으로 사용하는 것부터가 입에 붙지 않을뿐더러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건강’이 곧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신체’라는 뜻의 ‘유용성’과 ‘정상성’으로 손쉽게 번역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시급한 것은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저자 조한진희가 적실하게 지적한 대로, ‘건강을 잃어도 모든 걸 다 잃지는 않는 사회’, ‘아픈’ 사람의 몸과 마음, 권리와 속도에 관심을 갖는 사회다.
그렇다면 역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시는 일 다 잘되기를 바랍니다’ 정도가 무난했을까? 누군가의 복이 남의 복을 빼앗은 결과만 아니라면, 말로나마 누군가의 지복을 비는 게 저어될 건 뭔가. 하지만 그 인사도 석연치 않았던 건 새해 아침 뉴스를 보고 나서다. “기업과 사회, 환경이 공존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다는 LG그룹은 “용역업체 변경”을 핑계로 자사와 계약한 청소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집단해고를 통보한 뒤, 노동자들의 집회를 중단시키기 위해 식사 반입을 막고 전기와 난방 공급을 끊었다. 그 역시 청소노동자들처럼 ‘계약직’일 경비용역들은 시민들이 청소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보낸 도시락을 공놀이하듯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뿐인가. ‘포괄적 차별금지법’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모두 ‘나중에’의 일로 미룬 당의 대표가 새해 벽두부터 꺼낸 말은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이었다. 이 정권이 ‘촛불정부’를 참칭하며, 민주시민이 일궈낸 역사를 하루아침에 횡령하는 이 장면은 곧 닥쳐올 2021 디스토피아의 예고편인가? 이들도 누군가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따위의 인사를 들었겠구나 싶어 오래된 분노가 새롭게 치민다. 4차 산업혁명과 ‘뉴 노멀’을 운운하는 새해 첫날에 벌써 송도 건설현장, 울산 자동차공장에서 노동자가 죽었다. 취약자를 ‘보호’하겠다고 만든 요양원·구치소 등의 ‘격리시설’에서 취약자들은 가장 먼저, 가장 오래 방치됐다. 과연 코로나19 시대에 걸맞은 새해 인사란 뭘까. “모두에게 복된 새해”(김연수, <모두에게 복된 새해>)라는 관용구의 “낯선 발음”을 떠올리며, 지금 ‘아프고 약한’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다.
*이번 칼럼을 끝으로 ‘오혜진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연재를 마칩니다. 오혜진 평론가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