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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③] 2020년 한국영화는 '쓰레기장' 이다

새로운 세대가 (안)온다

김병규 평론가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거꾸로 눈에 보이지 않았던 다른 것들이 틈입해 들어온다고 믿는다.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고, 극장에 영화가 없다면 그런 버려진 조건들 속에서 영화의 자리를 재조정하는 시도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것들을 우리는 영화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 고민을 안고 굿바이 2020!

<변호인>

2010년대 한국 영화산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한 장면을 고르라면 <변호인>의 마지막 숏을 말해야 할 테다. 주인공 송우석(송강호)은 시위를 이끌다 구속되어 피고 신분으로 법정에 참석한다. 수의를 입은 송우석의 뒤로 그를 변호하기 위해 나선 변호인단이 차례로 일어선다. 송우석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장면이 바뀌면 ‘부산 지역 142명의 변호사 중 99명이 출석했다’는 자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결말은 군사정권의 폭거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지키려는 정의는 훼손되지 않으며, 그의 믿음이 대다수 군중에 전파되고 있다는 인본주의적 가치를 찬미한다. 법정은 그러한 최소한의 상식과 믿음이 국가 시스템의 절차로 승인되는 곳으로, 때로 파렴치하고 불공정하지만 끝내 주인공의 도덕적 우월성을 각인하는 상징화된 공간으로 펼쳐진다.

법정이라는 자리에 역사와 국가와 공동체의 삶을 명쾌하게 관통하는 대중영화의 자질이 새겨져 있다. 거기서 전달되는 명제는 간단하다. 송우석이 웅변하는 대로 ‘국가란 국민’이라는 것. 모든 권리는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 이런 대사를 통해 영화는 도덕적 합의의 지점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견이 제기될 리 없고, 추레한 반론은 악인들의 몫이다. 절대적인 통합의 자리가 도덕을 가장해 주어지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천만 관객을 모은 <변호인>의 파급력은 ‘법정에 선 보편적 인간’이라는 한국영화의 원형적 이미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이는 <암살>과 <밀정>에서처럼 모호한 정체성을 지닌 남성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 캔 스피크>와 <허스토리>에서 목소리를 되찾은 역사적 질서 바깥의 여성들로, 연달아 천만 관객을 돌파한 <신과 함께> 연작에서는 인물이 그리는 신파와 사후 세계의 스펙터클을 교직하기 위한 도착적인 배경으로 확장된다. 개별적인 영화의 제목을 추가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영화의 지형에서 법정의 광경이 반복된 것은 <변호인>이 불러낸 깊은 환대와 집단적 감흥의 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2020년 한국영화에서 발견되는 특징에 대해 말하기 전에, 올 한해 한국영화에서 지워진 면모를 먼저 언급하자면 바로 이런 법정이라는 공간의 기능이다. 한국영화의 인물들은 그들의 선악과 도덕적 승패를 판결할 정연한 재판에 참석하는 대신, 폐허가 된 버려진 도시를 제멋대로 배회하거나(<사냥의 시간> <반도>), 세계의 질서로부터 분리된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거나(<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임시적인 가상의 유토피아를 형성한다(<소리도없이>). <사냥의 시간>을 두고 안시환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한국영화는 <사냥의 시간>의 봉수(조성하)가 말하는 ‘법 바깥의 세계’가 전경화된 쓰레기장을 직면하고 있다.

버려진 세대의 도착적 결과물

<반도>

쓰레기장이라는 비유는 개별 작품들의 완성도나 수준이 형편없다는 심술궂은 비아냥이 아니다. 오히려 문자 그대로 아무렇게나 버려진 세계, 무언가 존재했다가 시효를 잃고 사라진 지대를 통과하고 있다는 인상에 대한 수사적 용법에 다름 아니다. <사냥의 시간>과 <반도>가 그리는 버려진 도시와 탈출에의 열망. <사라진 시간>과 <>의 불타버린 집,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폭발을 떠올려보자. 이는 법과 규범의 외곽, 국가와 개인의 접속이 차단된 각자도생의 지대. 그리하여 동시대 한국이라는 나쁜 땅(bad place)을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인다.

그런 세계에서 탈출과 전멸 외에는 다른 결론을 구상하지 못하는 상투적인 상상력이 따라오는 것은 필연적인 걸까? 이런 신호들을 두고 늘어놓기 쉬운 해석은 역사적 아버지가 사라진 뒤 상징적 자리를 잃어버린 다음 세대를 불러내는 것이다. 가난한 세대(그들은 주로 돈에 붙들려 쓰레기장이 된 공간을 서성인다), 기억 없는 세대(<사냥의 시간>에서 고아인 준석(이제훈)과 장호(안재홍)는 ‘부모가 있는 느낌’을 궁금해하며, <>에서 서연(박신혜)의 과거는 영숙(전종서)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뒤바뀐다. 그들에게 유년기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거나 흉터처럼 남아 있다), 방향성을 잃고 배회하며 이전 세대의 나쁜 실패를 반복하는 세대로 호명하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이 붕괴하고 방치된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도가 발생할 수 있으리라 예견하는 담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런 정형화된 담론에서 말하는 ‘새로움’이란 그리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세대의 영화, 혹은 그런 세대를 조명하는 영화들이 도착한 것이 아니라 그런 세대에 대한 진부한 해석이 반복되고 있을 뿐이다. 가령, <사냥의 시간>과 <>은 이런 가난하고 기억 없는 세대의 자의식을 수많은 영화의 표면을 흉내낸 기호들의 조합으로 드러내 보인다. 디스토피아풍의 도시, 주인공 일행의 서투른 범죄, 그들을 쫓는 킬러, 미스터리를 품은 기묘한 집, 타임워프, 연쇄살인마의 폭주. 익숙하기 그지없는 장르 영화의 기호들을 다기하게 오가는 두 작품은 정합적인 한편의 영화라기보다는 도처에 배치된 수많은 레퍼런스의 흔적에 짓눌린 잡동사니에 가까워 보인다. 이 영화들이야말로 쓰레기장의 영화에 해당하는 적확한 예시일 것이다. 반복건대, 두 영화의 완성도에 관한 평가의 언어가 아니다. 버려진 세대가 버려진 것들을 흡수하고 자란 도착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영화는 새로운 감각을 분출하는 세대가 아니라 과거의 ‘한국영화’를 모방하는 한국영화의 세대가 도착했음을 알린다.

미약한 결속과 공감일지라도

<내언니전지현과 나>

우리는, 이 가난한 세대는 과거에 종속된 새로움이라는 허황된 명제를 수행할 뿐인 걸까? 12월에 개봉한 <내언니전지현과 나>라는 작은 규모의 다큐멘터리는 조금 다른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적잖이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는 ‘망겜’ <일랜시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저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다(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그런 소재만으로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제목에서 감지되듯 기계장치 내지는 프로그램 매체에 얽힌 노스탤지어와 애착을 선점적으로 담아낸 김지현 감독의 <요세미티와 나>가 떠오른다). 왜 우리는 버려진 세계에 머물러 있는 걸까? 우리의 이야기는 그런 방치된 공간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인터뷰이로 나오는 연출자의 동생은 <일랜시아>의 캐릭터는 식물처럼 기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공동체의 식물화된 유희는 올해 한국영화에서 손쉽게 볼 수 있던 동물적 유희(물어뜯는 행위만을 반복하는 좀비의 동물성, 정해진 목표를 향해 움직일 뿐인 킬러의 육식동물적 기능)와 대비되는 성질을 드러낸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에서 그려지는 세대의 초상 또한 버려진 세계에 남아, 법과 규범의 바깥에서 매크로와 버그를 일삼는다. 하지만 이 세계의 공동체는 동물적 파국을 형성하는 대신 버려진 그래픽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조합하고, 플레이의 규칙을 재설정하며, 아무도 찾지 않는 이스터 에그를 발견하곤 한다. 확신할 순 없지만, 이는 폐쇄회로의 누더기를 잘라낸 ‘새로운’ 세계의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언니전지현과 나>의 말미에는 열기구를 타고 게임 월드를 관광하는 장면과 더불어 “카오스가 지구를 통제하고 지구가 어둠의 별이 되었을 때, 살아남은 몇몇 고대인들이 영력을 모아 일랜시아를 만들고 이주해왔다”는 <일랜시아>의 세계관 설정을 설명하는 자막이 삽입된다. 버려진 지구. 지구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방향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지금껏 지켜본 바로는 두개의 길이 가능한 것 같다. 그 하나는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르영화의 판본이다. 다른 하나는 언제든 로그아웃하거나 서비스가 종료될지 모르는 버려진 세계 안에서 미약한 결속과 공감의 신호를 주고받는 것이다. 이는 식물적이고 관광적인 태도를 닮았다. 이런 공동체라면 새로운 세대를 논하는 기성의 담론에 이렇게 받아칠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대는 오지 않지만, 그것은 우리의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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