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몇몇 대목은 서 대위의 전사를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든다. “내가 민정씨 걱정 많이 했다”든지 “반도를 뜨면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대사가 그렇다. 그리고 별다른 힘이 없어 보이는 서 대위가 여전히 631부대의 대장 자리에 있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관객도 있다. 영화가 주는 단서를 기반으로 서 대위의 히스토리를 유추하는 캐릭터 팬도 많고.
=어느 정도 스토리가 있는 인물이지만 그것보다는 장면 장면에 충실하려고 했다. 서대위는 정말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웃음) 나 역시 계속 그가 궁금했기 때문에 인터뷰하듯이 자문자답하며 인물을 찾아갔다. 그런 궁금증이 관객에게도 전달되고 관객 역시 그의 전사를 궁금해하게 된 거 아닐까.
-배우들 중에는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때마다 그의 성장 과정을 직접 자서전처럼 써본다든지 준비과정을 꼼꼼히 거치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프리퀄을 상상하게 할 정도로 궁금증을 자아내는 캐릭터라 그의 인생 전체를 찬찬히 설정하고 들어갈 법도 한데.
=캐릭터 분석을 하는데 그걸 문서화하지 않을 뿐이다. 영화에는 실리지 않지만 혼자서 서 대위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음악 같은 사소한 것들을 툭툭 떠올려봤다. 가령 서 대위는 사리가 들어간 음식, 라볶이 같은 것을 많이 좋아한다. 식당에서 음식 다 먹고 꼭 볶음밥을 시켜먹는 친구다. 서 대위의 첫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공리처럼 생겼을 것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나. (웃음)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때그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를 넣었다.
-옷이나 헤어스타일이 묘하게 631부대 중 가장 세팅된 느낌이다. 그 안에서도 나름 멋을 낸 느낌이랄까. (웃음)
=여러 의미가 있다. 언제든지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 반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구하러 왔을 때 외부인에게 멀끔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혹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인간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다. 서 대위에 대한 여러 가지 평행이론이 있었다. 한 가지로 규정 짓지는 않았다. 감독님이 허락하신다면, 테이크가 바뀔 때 다른 평행이론 속의 서 대위를 보여줬다. 이번 작품이 아니더라도 그런 식으로 연기해왔다.
-서 대위는 자신과 나름 가깝게 지내던 김 이병(김규백)도 생존에 방해가 될 때 망설임없이 총으로 쏜다. 이 캐릭터가 가진 섬뜩함을 단번에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 그리고 서 대위의 마지막 신이 그가 이곳에 아직 지휘관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에 관한 힌트였다. 서 대위는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무서워한다. 원래 대상을 알 수 없을 때 가장 무섭지 않나. 서 대위는 시작과 끝은 물론 매 장면 성질이 바뀌어 있다. 그렇게 하나로 파악될 수 없는 부분이 그가 631부대를 장악할 수 있는 힘이 됐다고 봤다.
-아까 언급한 서 대위가 좋아하는 것들 역시 그의 알 수 없음을 완성하는 것이었나보다. 그럼 이 캐릭터는 어떤 음악을 즐겨 들었을까.
=윤상의 <Back to the Real Life>도 있고, 이소라의 <난 행복해> <처음 느낌 그대로> <시시콜콜한 이야기> <청혼>…. 서 대위는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이소라 콘서트에 한번도 못 간 걸 후회하고 있다. 댄스음악도 들었을 거다. 그냥 그때그때 상상해서 넣어봤다.
-댄스음악이면 서 대위가 레드벨벳도 들을 수 있는 거고. (웃음)
=<Psycho>!
-2016년 좀비 바이러스가 시작된 <반도>의 세계관에서는 시기상 그 노래가 나올 수 없을 텐데!
=왜 안되나. 그냥 상상하면 다 되는 거다. (웃음) 원래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그렇게 떠오르는 곡을 넣어봤다. 그런데….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내가 무언가를 단정지어서 얘기를 하면 거기서 감상이 끝나버릴 수 있다. 관객에게 여러 가지 감상이 있을 수 있는데 내가 그걸 방해하는 느낌이 들어서 내가 캐릭터를 준비하며 생각한 바를 얘기하기가 조심스럽다. 그게 내 진심이다.
-정석(강동원)도 ‘대위’, 서 대위도 ‘대위’다. 같은 직업의, 나이대도 비슷해 보이는 두 남자가 4년 후 전혀 다른 인물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반도에 남아 있었거나 반도를 빠져나갔거나, 환경의 차이였을까.
=물론 반도에 있는 4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게 강력한 이유 중 하나였겠지만 환경 때문에 그리 된 것은 아니다. 상황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며 서 대위와 631부대에 변명거리를 만들어주기는 싫다. 반도에 남아 있었지만 선을 지켰던 민정(이정현)의 가족도 있다. 그리고 <반도>는 어떤 의미에서 <가족의 탄생>이다. 엔딩에서 준이(이레)의 대사도 그렇고 새로운 대안 가족의 형태를 생각해볼 수 있다.
● 나는 노력하는 벼락치기형 배우
-구교환 하면 왠지 연출을 먼저 하다가 정석으로 연기를 배우지 않고 날것의 그것을 추구하며 자기 영역을 구축한 배우, 라는 히스토리가 있을것 같은데, 의외로 처음부터 배우를 지망했다. (웃음)
=나도 연기 학원을 다녔다. 차근차근 스타니슬라프스키부터 공부했다. 갑자기 길바닥에서 튀어나온 배우가 아니다. (웃음) 처음에는 연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고민도 많이 해서 열심히 그 장면을 준비해왔는데 “레디, 액션!” 하는 순간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 사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젠 그 변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예전에는 계획했던 것을 실천해보자는 식으로 다가갔다면 지금은 연기하다가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도 그 인물의 것으로 끌어온다.
-과거 인터뷰를 보면 본인을 천재와 거리가 먼 노력형 인간, 벼락치기형 인간이라고 표현했더라. 두 가지가 직관적으로 딱 맞붙는 개념은 아닌데 구교환 안에서는 어떻게 연결되나.
=현장에 가면 알게 된다. 캐릭터의 의상을 입고 헤어를 하고 그 공간에서 상대배우와 대사를 주고받다 보면 비로소 알게 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건 평소에 생각을 많이 해야 가능하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평소에 계속해두어야 현장에서 벼락치기도 가능하다.
-연기가 독특하다는 식의 수식어가 배우에게 많이 붙는 편이고 그 중심에는 목소리에 대한 분석이 있다. 예전에는 목소리에 콤플렉스가 있었다고, 평범한 목소리를 내보려고도 해봤지만 본연의 목소리로 연기하게 됐다는 얘기도 과거 기사에 기록돼 있던데.
=내가 그렇게 세게 말을 했던가…. (웃음) 아무래도 사람 마음은 계속 바뀌는 거니까. 우리는 자기 목소리를 알 수가 없지 않나. 이 목소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요즘에서야 주변에서 어떤 피드백이 온다. 그리고 난 내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 얼굴을 보는 게 더 낯설다. 연기를 독특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접근하지는 않는다. 진심으로 연기를 하고 있나, 뭔가를 억지로 하려고 하지는 않는지 자기 의심을 많이 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 예상을 비켜가는 지점이 영화에서 겉도는 게 아니라 배우의 고유한 개성으로 남는다. 이건 100% 동물적인 본능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치밀하게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물로 보인다.
=원래 세상엔 내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더라. (웃음) 늘 비전형적이고 의외의 일이 넘쳐나고 준비했던 것은 늘 무너진다. 언제나 예측대로 흘러가는 게 없더라. 그걸 받아들이고 그때 가서 해결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상대배우가 주는 의외성에 나 역시 반응하게 된다. 가령 황 중사(김민재)와 김 이병이 나에게 어떤 것을 주면 거기에 쿵짝을 맞추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건 서로 의외성을 의도한 연기라기보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에 가깝다. 또한 내 연기가 겉돌지 않게 의식하며 연기하는 건 아니다. 어떻게 해야 잘 어우러질 수 있는지 방법을 알면 참 편할 텐데 그러지 못하니…. 그리고 연기를 어떤 식으로 정의하는 게 되게 조심스럽다. 예전에는 연기를 이렇게 하다가 요즘은 어떻게 태도가 바뀌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주저된다. 오히려 의심을 계속하면 했지, 누군가의 말에도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다.
-직접 쓴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하고 연출과 편집까지 병행하던 시절이 있지 않았나. 본인이 연기한 모습을 다시 마주하면서, 연출자의 눈으로 연기를 다시 보는 과정에서 자기 색을 찾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게 된다.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이) 어?!?! 진짜 그렇다. 이 얘기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나 자신의 구림을 온전히 마주하게 된다.(웃음) 듣고 보니 그렇게 자기반성을 하는 게 연기에 도움이 됐다. 근데 편집실이 아니라 현장에서 대사를 칠 때부터도 그랬다. 모든 계획은 무너진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이럴 줄 알았어’라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되게 긍정적인 말이다. 사실 <반도>에서 서 대위의 마지막 대사가 “이럴 줄 알았다”였던 테이크도 있었다. 연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 겸손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하면 예전의 것을 모두 없애버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게 늘 걱정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재밌다. 그래서 연기를 계속하는 것 같다. 이것은 연기실력이 는다는 개념은 아닌 듯하다. 연기에 실력은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얼마 전 <씨네21> 김혜리 기자가 팟캐스트 방송에서 구교환의 연기를 송강호와 비교했다. 관객을 계속 웃게 만드는데 그게 극의 톤을 해치지 않고 텍스트를 풍부하게 만들고, 그것이 웃기려는 강박이 아니라 인간사가 그러하다는 것을 이해하는 연기라는 점에서.
=(한참 당황하더니) 기자님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아이고, 침이 다 나오네. (웃음) 송강호 선배님은 신계에 계신 분이고 선배님의 무릎만 닮아도 좋을 것 같다. 아, 이거 논란이 있을 것 같은데? 연상호 감독님이 “호아킨 피닉스인 줄 알았다”고 하신 것 때문에도 지금 너무 힘들다. (웃음) 그런데 유머의 힘을 믿는 건 맞다. 가장 힘든 순간에도 유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위기를 넘길 수 있다. 그래서 되게 힘들 때도 유머를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내 감정 표현이 되고, 나 역시 다른 이의 유머로 위로받을 때도 있다. 내 작품에 “이게 뭐지?” 싶은 유머가 나온다며 당황하는 분도 있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면 그냥 웃으면 된다.
● 다음에도 영화가 다가와주길
유튜브 채널 ‘[2×9HD]구교환X이옥섭’에 올라온 <사탄의 브이로그>
-최근에 유튜브 채널 ‘[2×9HD]구교환X이옥섭’에 올라온 <사탄의 브이로그> 얘기를 해볼까. 이것은 브이로그인가, 초단편영화인가. 엔딩 크레딧이 없어서 누가 연출했는지 알 수가 없는데.
=연출은 이옥섭 감독이 했다. <노블레스>라는 매거진에서 4명의 감독이 100초짜리 초단편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브이로그 형태여야 하기 때문에 엔딩 크레딧이 없어야 했다. 제목과 본문도 굉장한 내러티브라고, 영상과 만났을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고 우리끼린 생각했다. (웃음) 유튜브에서 틀어졌을 때 이 작품이 극영화가 되고, 영화 자체가 브이로그일 수가 있다.
-형식과 경계에 대한 고민이 이번 작업에 녹아 있겠다.
=영화다운 것은 무엇이고, 넷플릭스다운 것은 무엇이고, 유튜브다운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플랫폼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들이 난 재밌다. 이제는 그냥 ‘이야기’라고 다묶어야 하지 않을까. 어렵지만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유튜브 채널 이름 ‘[2×9HD]구교환X이옥섭’은 어떻게 정해진 건가. ‘HD’는 말 그대로 ‘HD’ 화질?
=이제 영화를 필름으로 안 찍으니까 [2×9FILM]이 아니라 [2×9HD]로 하자는 일종의 유머였다. [2×9 1920×1080]라고 하면 너무 길어지고. (웃음)
-그 채널을 통해 영화를 무료로 공개했다. 그간 작업물들도 유튜브에서 바로 볼 수 있게 업데이트했는데,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고전적인 스탠스와는 대치된다.
=단순한 생각이었다. 단편영화를 틀 수 있는 창구는 많지 않고 우리는 계속 영화를 찍는다. 우리만의 유튜브 채널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유튜브에 작업물을 올리면서 계속 용기를 내고 있다. 어느 순간 내가 만든 영화나 내가 한 연기가 미울 때가 있다. 근데 또 돌이켜보면 다시 사랑하게 된다. 내가 했던 어떤 작업 중에 미운 시간도, 너무 열렬히 사랑하는 시간도 있다.
-연상호 감독은 “이런 더러운 상업영화!”라고 하며 캐스팅 제안을 거절할 줄 알았다는 농담을 했지만, 사실 구교환만큼 일명 ‘독립영화계 스타’임에도 상업영화에 열려 있던 배우가 또 없다. 예전엔 흥행 감독, 야망 있는 감독이 되겠다는 농담도하고 언젠가 천만 관객이 드는 영화도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관객을 많이 만나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작업물도 유튜브에 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역시 고리타분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상업영화, 독립영화를 구분지어 배우가 작품에 접근하지는 않지 않나. 나에게 <반도>는 그냥 <메기>의 다음 작품이다. 사실 난 일찍이 <김씨 표류기>에 ‘공익 요원 1’ 역으로 출연한 상업영화 배우였다. 왜 그 필모그래피는 주목해주지 않고…. (웃음) 하지만 관객이 그렇게 분리하는 게 편하다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오늘 구교환의 연기와 작품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단순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려고 한다. 지금 구교환에게 영화는 무엇인가.
=음…. 다소 촌스러운 말이지만, 계속 어렵고 두렵다. 그런데 영화가 나에게 와주면 너무 반갑다. 그래서 계속하고 있다. 부디 다음에도 나에게 영화가 다가와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