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내 부모의 삶을 문장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가 존재하는 걸까. 독립 후 일을 시작하면서 아버지와는 20년 넘게 절연 상태였던 하루키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뒤늦은 화해를 하고 그의 죽음 후 아버지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한다. 그의 아버지, 무라카미 지아키가 위인전을 써야 할 만큼 역사적 인물이라서가 아니다. 한 평범한 남자가 역시 평범한 아들을 낳고 살아간 기록, 삶이란 그저 우연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루키는 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중략)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 있을 뿐이 아닐까.”(93쪽)
그 우연이란 이런 것들이다. 하루키의 할아버지인 무라카미 벤시키는 교토의 주지승이었고, 둘째 아들인 지아키도 계승 후보였으나 장남이 절을 이어받았고 지금은 하루키의 사촌이 승계했다. 만약 하루키의 아버지가 절을 승계했다면, 하루키가 주지승이 되었을까. 징집됐던 하루키의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와 음악 교사였던 어머니와 결혼한다. 하루키의 어머니는 원래 약혼자가 있었으나 그가 전사하자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하루키는 만약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나의 책들도 없었을 거라며, 소설가인 지금이 우연의 환상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책에는 하루키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단상은 적다. 국어 교사였고 하이쿠 쓰기가 취미였으며, 전쟁에서의 상처를 오래 간직했던 지아키라는 남자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애쓴다. 마치 <토니 타키타니> 속 토니의 아버지 쇼자부로의 건조한 소개글처럼. 아버지의 일생 중 가장 길게 서술되는 것은 군인 시절이다. 개인의 기록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역사를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하루키 소설의 팬에게는 작가의 유년이 그의 소설들(<해변의 카프카>나 <1Q84>)에 남긴 퍼즐을 맞춰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의미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현재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