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페이스북 페이지 ‘내가 이제 쓰지 않는 말들’에 올라오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는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혐오 표현을 돌아보자는 이 캠페인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제안했다. ‘확찐자, ◯밍아웃, 결정장애, 장애우, ◯린이, 거지 같다, 건강하세요’ 같은 말을 사용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됐다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언어에 예민하고자 노력하지만, 무심코 쓴 표현이 부끄러웠던 경험은 내게도 있다.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주장을 펼치는 내 글에 ‘전장’(戰場), ‘전선’(戰線) 같은 군사 용어가 종종 등장한다는 점을 나는 최근에야 의식했다. 병역거부운동을 통해 군사주의에 반대하고 ‘평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시민단체 ‘전쟁없는세상’의 활동을 접하면서부터다. 전쟁의 심상을 손쉽게 소환하는 일에 신경 쓰게 되자, ‘핵노잼’, ‘핵꿀잼’ 같은 유행어들도 심상치 않게 여겨졌다.
낯선 대상을 친숙한 대상에 빗대 표현하는 방식인 ‘비유’는 꽤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위험할 때도 있다. 엄연히 서로 다른 두 대상을 같은 층위에 놓거나 동질적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양자 모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아우슈비츠’에 비유한다든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안방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라고 일컫는다든지, 홍콩 민주화 항쟁을 ‘제2의 광주’라고 칭하는 것은 양자의 구조적 상동성 혹은 상황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일지라도, 각각의 사건이 속한 역사적 맥락과 고유성을 휘발시킨다. 대상의 복잡성을 들여다보지 않게 함으로써 사유의 지체를 초래하는 것이다. 비유는 때때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다.
물론, ‘언제나 옳고’ ‘모두에게 무해한’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어는 그런 정합적인 의지를 늘 배반하고 초과한다(‘자장면’만이 표준어로서 배타적 권위를 가질 때에도 우리는 늘 ‘짜장면’을 맛있게 먹지 않았나!). 차라리 언어란 ‘오염’과 ‘전염’의 탁월한 형식이라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바다’의 의미망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김애란의 지적은 세계와 관계 맺는 당대인의 태도·욕망·무의식이 언어에 매우 빠르고 적나라하게 기입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바다’가 더이상 범상한 비유로 쓰이지 않는 세계는 ‘그 이전과는 다른’ 세계다.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돌아보자는 캠페인도 단지 ‘올바른’ 단어를 발음하고, 그럴 수 없다면 입 다물라는 계몽과 경찰의 기획이 아니다. 획일적인 표현과 관성적인 인식을 반복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경험과 규범의 한계를 초월하는 언어의 비옥한 가능성을 더 풍성하게 누리자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세계와 더 입체적으로 관계 맺고, 더 복잡하게 연루되자는 제안이다. 수전 손택이 ‘암과 싸우다’ 따위의 ‘은유로서의 질병’을 거부함으로써 알려준 것은, 질병이 ‘싸워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저 ‘질병’일 뿐이라는 투명한 진실과 그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질 ‘더 자유로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