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완 감독은 관록의 배우 김혜수가 단번에 매료된 영화적 세계를 만든 신인감독이다.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내가 죽던 날>은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김혜수)가 외딴섬에서 벌어진 10대 여성 세진(노정의)의 살인 사건을 맡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첫 작품이기에 좋아하는 배우이자 염두에 둔 배우 김혜수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던 박지완 감독은 캐스팅이 성사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시나리오를 보낸 지 일주일 만에 만나자는 답변이 왔는데, “김혜수 선배님이 워낙 인품이 훌륭한 분이어서 거절하더라도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려는가보다라고 생각”했다. 작은 코멘트라도 듣고자 자리에 나갔던 박지완 감독은 그날로 김혜수 배우의 출연 의사를 듣게 됐다.
그만큼 <내가 죽던 날>은 이야기의 힘이 큰 영화다.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자살 사건을 다루면서도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무엇보다 캐릭터들간의 연대가 따스하다. 신인감독의 이채로운 세계가 담긴 어촌 스릴러 <내가 죽던 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박지완 감독을 만났다.
-10대 여성의 자살 사건을 좇는 현수의 이야기다. 영화의 로그라인(한 문장으로 요약된 줄거리.-편집자)을 세진으로 시작할지, 현수로 시작할지 궁금하다.
=로그라인은 현수, 제목은 세진을 기준으로 한다. 로그라인은 세진이를 들여다보는 현수가 ‘나도 그런 날이 있구나’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제목인 <내가 죽던 날>은, 말 그대로 세진이 죽던 날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 제목을 두고 우울하다며 “이렇게 해서 투자되겠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제목은 떠오르지 않아 고수하고 있었는데, 혜수 선배님이 좋다고 하셔서 속으로 기뻤다.
-배경을 섬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전작 단편 <곰이 나에게>에서도 바다가 등장하는데.
=전 직장 동료가 울릉도에 살고 있다. 친구에 따르면, 섬만의 특이한 점이 많다. 말하자면, 섬에는 영원히 거기서 살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이웃이 어떤 사람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도시는 계속 옮겨다니면서 살지만 섬은 다르다. 섬사람들을 나쁘게 다룬 영화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많은 사람이 떠난 섬에 어린 여자애가 들어왔을 때 할머니, 할아버지와 더 잘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시나리오를 썼다.
-자신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는 현수의 꿈 이야기가 강렬하다. 배우 김혜수의 실제 사례라고.
=현수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두고 선배님과 만나 자주 수다를 떨었는데, 어느 날 선배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도 잠을 못 잔 적이 있었는데 수면제를 먹고 자면 내가 죽어 있는 걸 보는 악몽을 꿨어”라고 스치듯 이야기했다. 당시엔 꿈 내용에 놀랐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슬프더라. 내 인생도 나밖에 모르는 것이지만, 김혜수 선배님의 인생도 선배님밖에 모르는 것이구나 싶었다. 영화에 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이런 마음으로 영화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뿐이었다. 민정(김선영)과 원룸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장면을 준비할 때 악몽 관련 이야기를 하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실 나는 연출자로서 개인의 인생을 가져다가 쓰는 게 괜찮은 걸까 고민이 많았다. 이분이 내 영화에 애정을 가져주신다는 이유로 그걸 가져다 쓰면 되는 걸까…. 더구나 영화가 다 공개된 상태에서 혜수 선배님이 마음속으로 ‘괜히 넣었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책임질 수 없지 않나. 연출자로서 너무 어려웠다. 편집해도 큰 문제가 없게끔 A안과 B안으로 나눠 찍기까지 했다. 선배님이 내게 “그 장면 빼자. 마음이 바뀌었어”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길 기다렸던 적도 있다. 그러나 혜수 선배님은 그에 대한 코멘트는 없었고 다만 “너의 결정이다”라고 하셨다.
-“인생이 생각보다 훨씬 길어”란 순천댁(이정은)의 대사가 뭉클했다.
=사실 냉정한 말이다. 인생이 길다는 건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순천댁은 세진이한테 아무도 널 구하러 오지 않을 거란 점을 냉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를 혼자 섬 밖으로 보내는 것도 냉정한 일이지만, 이곳 섬에 갇히면 순천댁 자신과 똑같은 형태로 살 수밖에 없고 세진이에게 좋지 않다는 걸 냉정하게 말한다. 그런데 (이)정은 선배가 그 말을 하는 순천댁의 마음을 잘 읽어서 잘 표현해주시지 않았나 싶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를 27살에 입학했는데 그땐 되게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아기다. (웃음) 당시엔 내가 살아온 나이가 그만큼이니까, 그리고 앞으로 살 날이 잘 그려지지 않으니까 늦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생이 길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세진에게는 빚을 지고 자살한 아버지, 마약으로 감옥에 간 오빠가 있다. 현수에게는 이혼 귀책사유를 만들고도 현수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는 남편이 있다. 가족이 이들에게 가장 아픈 지점이란 게 의미심장하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정상가족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나.
=사회가 인정하는 가족의 모습과 상관없이 마음이 맞는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천댁은 남동생이 원양어선을 타다가 실종돼 조카만 남겨졌을 때, 조카를 책임지려는 마음으로 입양해서 가족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세진이의 아버지가 범죄자가 아니었다면 재혼을 하고, 세진이는 새엄마한테 마음을 줬을 것 같다. 정상가족을 이루려 했던 사람은 현수인데 그것도 현수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든다. 어떤 면에서 한국 사회가 가족애를 강조하고 정상가족에 대한 욕구도 많지만, 사실 가족이라고 언제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존재하는 다른 형태의 가족도 많다.
-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언론홍보영상학과에서 영상을 전공했는데 학과 강의는 모두 방송 위주였다. 늘 영화를 하고 싶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장화, 홍련> <4인용 식탁>을 만든 영화사 봄에 들어갔다. 많이 배웠지만 시험이라도 한번 쳐보자는 마음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2007년에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졸업 후 <김씨표류기>와 <초능력자> 스크립터를 했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 <여고생이다>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나는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다. 일했던 영화사 봄 대표님도 여성이었다. 여성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사회에서 여성으로 인식된다는 걸 늦게 알았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때 알았던 것 같다. 연출 전공자 중 여성은 나 혼자였다. 그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많이 바뀐 거 같아도 사실 별로 바뀌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죽던 날>의 스탭 성비는 50 대 50이었다. 스탭들 말로는, 성비가 50 대 50인 현장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 <여고생이다>로 영화제를 다닐 때 상은 대부분 여성감독들이 받았다. 그 감독님들이 나보다 빨리 데뷔할 줄 알았는데, 아직 많이 나오지 않았다. 아마 나처럼 집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더 많은 여성감독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분들이 어떤 영화를 찍을지 궁금하다.
-차기작으로 생각하는 게 있다면.
=2012년에 쓴 시나리오가 2020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내 관심의 깊이가 너무 얕으면 오래 못 버티는 것 같다. 오래 버틸 수 있는 걸 찾아서 영화로 만들고 싶다. 다만 <보건교사 안은영>과 같은 방식이어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세랑, 강화길 작가를 좋아하는데, 이들은 다음 세대가 어떻다는 걸 보여주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연출을 맡은 이경미 감독이 나와 더 가까운 세대인데, 다음 세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경미 감독이 만든 드라마 같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게 재밌다. 나도 이런 작업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