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0일은 김민식 작가의 칼럼 때문에 난리가 난 날이었다. 작가가 사과문을 썼고, <한겨레>도 이례적으로 두 차례에 걸친 사과문을 쓰고 칼럼을 삭제했다. 물론 작가의 사과문은 여전히 비판받을 만했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에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보이긴 했다.
문제의 칼럼은 무려 ‘지식인의 진짜 책무’라는 제목을 달고 아버지의 폭력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글은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출발한 셈이다. 아버지에게 맞은 이야기를 책에 써도 아버지는 보지 않으니 괜찮다, 어머니는 팔순이 되어서도 내 책을 다 필사하실 정도로 열심히 읽으시는데,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 많은 데다 책을 많이 읽어서 아버지에게 ‘존중 없이’ 말을 하니 아버지는 ‘손찌검’을 한다, 나는 어머니가 안타까웠고, 그건 어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정서적 폭력’이었다, 더 똑똑한 어머니가 끌어안아주었어야 한다, 라는 전개로 지식인의 계도적 자세를 비판했다. 비유부터 논리까지 총체적으로 문제가 있는 글이었다.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두고 뭐라고 하느냐는 사람도 있는데, 달을 가리키는 손에 권총 같은 게 들려 있으면 그런 걸 왜 들고 있느냐고 물어보는 게 당연한 일이니 그런 한 가지 원칙만 단순히 들이댈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그걸 몰라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니까. 심지어 그 글은 그 달을 봐도 좀 이상하다. 그러니까 지식인의 진짜 책무는 대중에게 어떤 주장을 할 때 대중에 대한 애정과 존중을 담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게 지식인의 ‘진짜 책무’인가? 정말? 지식인의 책무 중에는 은폐된 진실을 드러나게 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도 있지 않을까? ‘존중이 없다’, ‘말본새가 싸가지 없다’는 말은 종종 듣기 싫은 말을 들었을 때 나오는 대답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의 글은 가정 폭력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책 읽는 여성, 책 읽는 약자를 모욕했기에 더 큰 공분을 샀다. 그가 쓴 글은 어머니를 보며 ‘책 좀 읽는다고 저렇게 말하니 매를 벌지’라고 생각했다는 증언에 지나지 않았다. 이건 페미니즘까지 갈 것도 없이, 폭력을 당하면서도 책을 읽은 어머니에 대한 멸시가 아닌가. 그녀가 왜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글에서는 아들의 차가운 시선만 느껴진다. 그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책은 지식인의 무기일 뿐만 아니라 약자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 두 가지 개념을 혼동해 책을 읽는 약자를 순식간에 오만한 지식인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을.
작가의 개인적인 치부나 약점, 무의식적인 인식이 드러나는 글이라 비판을 하는 일이 조금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의 글에서 맞으며 자란 아들이 폭력을 인정하는 적나라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글이 쓰이고, 완성되고, 전달되고, 데스킹을 거쳐, 지면에 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살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