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기만한 날들을 위해>에는 정신과를 다니며 우울증약을 처방받는 한편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주부로서 언제나 빈틈없이 일했고 남들 앞에서는 모자람 없어 보이는 신도시의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남편의 잦은 외도와 원정 성매매로 내면이 망가진 상태다. 운전은 그런 그녀가 제 삶을 주체적으로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은 수단이다.
박완서 작가의 기념비적 단편 <꿈꾸는 인큐베이터>에서도 운전이 여성의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비추는 도구로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으리라. <꿈꾸는 인큐베이터>와 <기만한 날들을 위해> 사이에는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기혼 여성의 삶은 여전히 답답해 숨이 턱 막힌다. 아마도 중산층 4인 가족으로 대표되는 신도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같지는 않다. 기혼 여성의 변화를 촉구하는 존재로, 딸이 대표하는 젊은 여성 세대가 새롭게 등장했다. 딸들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남성 세대에게 반기를 드는 한편, 어머니에게도 더이상 현실에 순종하고 타협하며 살지 말라고 외친다.
단편 <우환>에는 자궁 조직 검사를 받는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병원에서 검사를 몇 차례 받으면서 점차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직감하게 되는 과정이 단편의 한축을 맡는 한편, 다른 한축은 근심에 젖으면서도 일상에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부지런히 움직이는 주부의 일상이 맡고 있다. 생활비가 모자란 시절 해지해버린 실비보험을 아쉬워하는 한편 저녁에 돌아오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반찬을 만들고 각종 고지서를 정리하는 풍경은 현실감이 생생해 피부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다.
단편 <경년> 또한 멀어진 자식들과의 관계를 메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편 남학생과 여학생을 사뭇 다르게 취급하는 현실의 차별적인 시선을 애써 밀어내는 여성의 내적 투쟁이 그려져 있다. 고독할지언정 내면의 결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투쟁이다.
새롭게 살기 위하여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세상 모두가 다 엉망이라는 걸 나는 그 젊은 여자에게 속삭여주고 싶었다.”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