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얼핏 평범해 보이는 제목이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 특별함이 곧바로 드러난다. 이를테면 이렇다. 승진을 위해 영어 수업을 듣던 이 토익반 학생들이 알고 보니 회사의 비리를 밝혀낸 장본인들이라면? 그리고 이들 모두가 담배 심부름을 하고 커피나 타야 했던 고졸 여사원들이라면? ‘영어토익반’ 학생들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삼진그룹’의 부조리를 만천하에 공개하는 이야기. 이제는 영어토익반이란 이름이 더 힘 있고 통쾌하게 와닿는다.

자신이 다니는 삼진그룹이 국내 최고의 회사라고 생각하며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생산관리3부 사원 자영(고아성). 완벽한 보고서를 제출할 만큼 실력이 뛰어나지만 상고 출신이라는 한계로 8년째 사원 직책에 머물며 책상을 치우는 등의 잔업만 도맡고 있다. 자영의 유일한 목표는 토익 600점을 넘어 대리로 승진하는 것. 그러나 지방의 공장으로 외근을 간 자영은 페놀이 섞인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다. 함께 외근 나간 최동수 대리(조현철)를 통해 상황을 보고하고 회사는 곧바로 조사에 착수하지만, 수치상의 결과는 ‘문제 없음’. 믿을 수 없던 자영은 추리 끝에 폐수에 섞인 페놀의 양이 기준치를 수십배 이상 넘어섰다는 보고서와 해당 보고서를 폐기하란 지시에 관한 정황까지 파악하게 된다. 과연 폐수 유출과 보고서 폐기를 지시한 사람은 누구일까. 자영은 친한 친구인 마케팅팀의 유나(이솜)와 회계팀의 보람(박혜수)과 함께 흩어진 증거들을 하나하나 짜맞추기 시작한다.

자영, 유나, 보람의 추리를 따라가는 과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첫째로 세 캐릭터의 개성과 역할 분담이 확실하고, 둘째로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이 두 요소를 제대로 표현해냈기 때문이다. 먼저 자영은 폐수 누출 현장을 목격한 순간부터 모든 정황이 밝혀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발로 뛰며 탐문하고 사건의 중요한 증거들을 확보하는 탐정 역할을 담당한다. 배우 고아성은 예리한 눈빛과 당당한 표정으로 자영의 의지를 다부지게 표현한다. 주변의 압박과 만류로 자영이 잠시 흔들릴 때마다 유나는 그 옆에서 자영을 굳건히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유나는 학벌이 걸림돌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토익 수업 공고에 회의적으로 반응하지만 사건을 공론화할 기자를 섭외하고 서류를 빼돌려줄 동료를 확보하는 등 세 사람의 행보에 힘을 싣는 결정적인 인물이다. 이솜 배우의 아우라는 리더 격인 유나의 카리스마를 더욱 공고하게 해준다. 올림피아드 우승자 출신의 수학 천재 보람은 어리바리해 보이지만 수학적 능력과 암산으로 자영이 받아온 자료들을 빠르게 분석해 일의 정확도와 속도를 높인다. 가짜 보고서의 수치가 너무 적게 나오자, 자영으로부터 하수구 구멍의 크기와 폐수의 양 및 속도 등으로 대략적인 유출량을 파악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전작 <스윙키즈>와는 상반된 박혜수 배우의 변신이 눈에 띈다.

영화의 배경이 90년대인 만큼 미술팀과 소품팀은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 로케이션의 일부 요소와 삼진그룹 로고, 토익 교재, 컵라면 포장지 등을 직접 제작했다. 배우들의 의상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는데 부모님의 앨범과 각종 영상자료들을 참고해 컨셉을 잡고 동묘 시장을 방문해 복고풍의 의상들을 구매했다. 갈매기 눈썹과 블루 블랙 헤어, 미니스커트와 어깨 퍼프가 강조된 재킷 등 이들의 노력으로 의상은 90년대의 시대적 배경과 인물들 각자의 개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됐다.

반전 기법을 자주 사용해 후반부의 임팩트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럼에도 영어토익반의 모든 인물들이 연대하고 결국 힘을 합쳐 승리를 쟁취하는 서사가 감동적으로 와닿는다. 세대를 막론하고 부당한 차별을 겪거나 이에 맞서본 이들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이다.

CHECK POINT

실제 폐수 유출 사건을 토대로

1991년 구미에서 있었던 낙동강 폐수 유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종필 감독은 영화의 오프닝에 90년대 폐수 유출 사건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임을 언급하면서 “당시 실제로 저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전한다.

생소하고 흥미로운 90년대 문화들

영화의 초고는 홍수영 작가가 썼는데, 90년대 한 기업에서 글로벌 시대를 맞이해 토익반이 개설됐고 작가 자신이 해당 기업에서 영어 강사를 했던 경험을 녹여냈다고 한다. 삼진그룹에서 하는 사내 건강 체조도 오늘날엔 낯설지만 90년대 직장인들에겐 익숙한 문화다.

“도로띠!” 맛깔난 영어 대사

유나는 자영의 영어 이름인 도로시를 “도로띠”라 발음하며 th발음을 강조한다. 그 밖에도 “유 아 롱!”(You’re Wrong!)이라며 정직한 발음으로 할 말 다 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굉장히 재밌고 유쾌하게 묘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