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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을 경유해 이경미 유니버스를 탐험하는 법
송경원 2020-10-14

이상한 것, 이경미스러운 것, 영화적인 것

“내가 보는 세상은 비밀이다. 그리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타고났다. 시발.” 이경미의 세계는 단정하게 정돈된 것들, 익숙한 말들 뒤에 붙는 단 한마디 욕설을 통해 완성된다. 이때 연출자로서 이경미는 ‘시발’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밉지 않게 보일 수 있을지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버린 사람처럼 심혈을 기울인다. 시발, 이라는 비속어가 슬쩍 갖다 붙는 타이밍과 여운. 읊조리는 투로 슬쩍 붙이면서도 발음은 흘리지 않는 선명함. 억양과 말투는 물론이거니와 말을 내뱉을 때 주변의 색깔과 배경을 받쳐주는 음악까지 모든 것이 ‘시발’이라는 한 단어를 예쁘고 사랑스럽게 품기 위해 준비된 것만 같다. 그 순간 단어에 담긴 딱딱한 의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해방되고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가는 마법의 주문으로 변모한다. 본래 주문이란 그런 것이다. 의미보다 그걸 어떤 방식으로 외우느냐가 핵심이다.

이경미스러운 것: 지랄의 탄생

<보건교사 안은영>(이하 <안은영>)은 한마디로 괴랄하다. ‘지랄맞게 괴상하다’ 정도로 풀어낼 수 있는 이 비속어에는 언어의 욕망이 담겨 있다. 아마도 지랄맞다, 괴상하다 각각의 단어로는 부글부글대는 이상한 기분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려웠으리라. 그 달아오른 마음을 한 단어에 우겨넣으려다보니 단어의 형태는 뒤틀리고 꼬부라진다. 괴랄, 이라는 말은 언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형에 가깝다. 그 정도의 비틀림은 되어야 기묘한 심정이 어느 정도라도 대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묘하고 재미난 세계였던 <보건교사 안은영>의 이야기는 이경미의 손길을 거쳐 지랄 맞을 정도로 괴상한, 그래서 더 매력적인 세계로 변모한다.

<안은영>의 이야기 자체는 그리 낯설지도 기발하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게 정돈되고 익숙한 이야기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여자가 있고,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를 퇴치한다. 그게 전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사람들의 감정과 주변의 영향을 받아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에 제거를 해줄 필요가 있다. 다른 곳에선 귀신이나 유령, 엑토플라즘이라고 불리던 이 현상을 <안은영>의 세계에서는 젤리라고 명명한다. 그 정도뿐인 미묘한 변주. 안은영(정유미)은 젤리들을 보고 없앨 수 있지만 한계도 있다. 플라스틱 칼로는 하루 15분, 비비탄총으로는 하루 22발, 온갖 종교의 힘을 빌리면 하루 28발까지도 가능하다. 시간 제약이 있는 울트라맨 같은 설정. 거기에 같은 학교 한문 선생이자 젤리를 볼 순 없지만 맑은 기운을 소유한 홍인표(남주혁)가 등장하면서 서로를 보완하는 동료가 되어준다. 안은영은 홍인표를 통해 기운을 충전하고 거침없이 젤리들을 격파해나간다.

<안은영>을 히어로물이라고 해도 좋고, 오컬트물이라고 해도 좋다. 안은영을 퇴마사, 영웅, 젤리마스터, 정신이 약간 이상해 보이는 사람 등 뭐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런 구분이나 명명 따윈 사실 무의미하다. <안은영>을 비범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익숙하고 무난한 요소들을 조합하는 방식이다. 정세랑 작가의 원작부터 그러하다. 기시감이 드는 설정과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오컬트 호러에 가까운 소재를 명랑만화의 노선으로 포장했기 때문이다. 뼈대는 오컬트 히어로인데 색칠을 발랄하게 해버렸을 때 발생하는 부조화. 기묘하고 즐거운 삐걱거림. 그것이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을 재미나게 만들어주는 동력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안은영>도 이러한 방향성을 유지한다. 아니 홍인표를 만난 안은영처럼 이경미라는 동료를 얻어 가속페달을 밟는다.

이경미 감독의 연출은 기본적으로 부조화에서 출발한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형형색색 매력 넘치는 구슬들인데 이것을 한줄로 꿰었을 때 서사상의 필연이나 맥락이 거의 제거되어 있다. 혹은 한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경미 감독이 넷플릭스 드라마 <안은영>에서 취한 방식, 아니 이경미 세계의 기본 법칙은 관성을 해체하는 데 있다. 다만 이건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접근이다. 이경미는 새로운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 자체는 누구나 공감할 법한 보편타당하고 상식적인 것에 기반한다. <비밀은 없다>는 남편의 외도로 딸을 잃을 뻔한 여자의 닳고 닳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쥐 죽은 듯이 살던 연홍(손예진)이 눈을 까뒤집으며 남편에게 분노를 쏟아낼 때 영화는 예상치 못한 에너지로 스크린을 잠식한다. 이야기 이상, 언어 이상의 정서를 포착하는 순간들. 오직 장면으로만 표현되고 전달되는, 이른바 ‘영화적’이라 믿어지는 것들의 속성을 이경미의 영화 역시 품고 있다.

소설을 영상매체로 옮긴다는 건 보편타당한 정보 이상의 모호한 정서까지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정서는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와 관객 사이 반응의 결과물이다. 여기서 스토리는 최소한의 뼈대에 불과하다. <안은영> 1화의 오프닝을 전달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젤리를 보던 안은영이 보육원에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바깥 창문에는 처음 보는 소녀가 손을 흔들고 있고 엄마는 상담하는 선생님 옆에서 걱정스러운 듯 가만히 손을 잡아준다. 교실 밖에서는 아빠가 초조한 듯 서성이며 기다린다. 엄마와 어린 은영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선생님은 창밖의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불안한 아이가 심리상담을 받는 것 같은 이 장면의 실상은 이렇다. 창밖의 소녀와 손을 잡아준 엄마는 진즉에 죽은이들의 마음이 남아 형태를 갖춘 젤리들이다. 선생님과 아빠는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듯하고 어린 은영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젤리가 된 엄마는 “은영아, 울면 안돼. 웃어. 그래야 행복해져”라는 말을 남기고 녹아 없어진다. 젤리의 세계라는 진실을 깨닫고 나면 앞선 장면들이 전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린 은영은 진즉에 죽은 또 다른 소녀를 보고 있었던 것이고, 마찬가지로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님은 마음에 둔 남자로서 은영의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로 충분한가. 이런 정보들은 최소한일 뿐 장면의 정서를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 <안은영>의 오프닝이 주는 기묘함을 설명하려면 차라리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사운드가 나오는 순간부터 영화가 시작된다고. 잔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던 배경음악 위로 어른이 된 은영의 내레이션이 얹히며 젤리의 실체를 설명한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점액이 남듯이 그것은 욕망의 흔적.” 그 표현 그대로 <안은영>의 사운드는 연출자 이경미가 남기는 욕망의 흔적이다. 신비로운 배경음악 위로 아빠와 선생님의 연극적이고 작위적인 목소리가 더해지고 그 위에 은영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겹쳐진다. 배경음악은 이제 신경질적이고 거슬리는 음색으로 바뀌어가고 엄마가 젤리로 녹아 없어질 때 나는 불쾌한 효과음까지 더해지며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불안해져간다. 그 위로 더해지는 한마디, 시발. (바로 뒤에 따라 붙는 신나고 발랄한 전자음악까지 더해져) 이경미의 불협화음은 그렇게 완성된다. 이경미의 욕망은 보여주는 것, 그러니까 시각 이미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흔적처럼 쌓여가는 사운드 몽타주에 맺힌다. 요컨대 이경미의 방식은 공감이 아니라 충돌이다. 불협화음을 통해 불안과 불균형, 부조화를 야기시키는 것이야말로 이경미가 이 지루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수단인 셈이다. 어쩌면 이건 구태여 현실을 모방하려 애쓰지 않는 종류의 영화들이 가진 공통적인 미덕이다.

이상하다는 말은 이상하다. 이 말은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고 거기에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밀어낸다. 영화를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정상적인 것은 아마도 대다수 관객이 익숙해진 장르영화, 서사영화들을 지칭할 것이다. 이때 이경미는 정상을 규정지을수록 그 바깥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는 감독처럼 보인다. 어쩌면 스스로 그것이 이상하다는 자각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저 그 편이 좀더 재밌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닐까. ‘웃으면 복이 온다’라는 교훈에 따라 “내 몸이 좋아진다”라는 구호와 함께 기묘한 체조, 억지스런 웃음을 반복하는 학교 조례시간의 풍경은 한끗 차이로 갈린다. 이상하고 재미있거나 이상한데 재미있거나 혹은 이상해서 재미있거나. 어쨌든 재미있다. 언뜻 <다세포소녀>(2006)를 연상시키는 이 비정상적인 학교가 마냥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마도 감독 스스로 이런 요소들을 별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세포소녀>가 이상함이라는 코드를 가져와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면, <안은영>은 “이게 진짜 이상해?”라고 진심으로 되묻는 것 같다. 홍인표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나쁘지만 않으면 평범한 것보다 이상한 게 좋아요”.

이경미 감독은 정상적인 것들의 문법을 최대한 가져와 사용하되 그 위에 자신의 변주를 더한다. 아이들의 과장된 웃음소리, 뜬금없이 지나가는 오리들과 오리 소리, 그리고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라는, 나른하게 퍼지는 창립자 동상의 내레이션 소리. 세 가지의 이질적인 사운드가 맥락 없이 충돌할 때 관객은 기이한 감흥에 휩싸인다. 의도나 의지, 본인의 자각 여부와 무관하게 이러한 이경미식 연출은 끊임없이 낯섦을 제공하고 균열을 낸 끝에 위태로워 보이는 자리로 관객을 초대한다. 사운드의 충돌이야말로 이경미 세계의 본질이며 이것을 이상하다고 거부하고 밀쳐내지 않는 이들만이 그 어여쁜 세계를 즐길 수 있다. 에피소드 5화에서 밝혀지는 비밀이 하나 있다. 안은영은 고등학교 친구 강선(최준영)의 조언을 받아들여 외면하고 움츠러드는 호러의 세계가 아닌 명랑만화로 채색된 키치 세계를 선택했다. 귀엽고 예쁜 젤리의 세계는 사실 안은영이 창조해낸 것이나 진배없다. 이것은 운명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당하겠다는 자존적인 의지의 결과다.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로의 전환. 그리하여 안은영은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무지개 검을 휘두르는 히어로가 된다. 히어로는 타고나는 재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불행을 내버려두지 못하는 마음을 통해 거듭나는 것이라는 만고불변의 법칙을 <안은영> 역시 수행한다. 선한 의지, 책임감, 용기, 연민, 혹은 오지랖. 무엇이라 불리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안은영에 마음이 쏠리는 이유는 끊임없이 투덜대고 궁시렁대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지랄’을 하기 때문이다. 그 지랄의 과정이 참으로 어여쁘다.

영화적인 것: 이경미의 소리

문득 안은영의 이러한 씩씩한 선택이 넷플릭스로 간 이경미, 혹은 영화인들의 선택과 겹쳐 보인다. 영화의 자리가 위협받는 오늘날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플랫폼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알폰소 쿠아론이 <로마>를 찍고, 마틴 스코시즈가 <아이리시맨>을 찍는 것처럼 그 와중에도 상당수가 OTT에서도 여전히 전통적이고 영화적인 것을 시도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안은영>은 기존의 전통적인 드라마에서 보기 힘든 시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장르나 소재, 스토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사운드 몽타주를 활용한 (다소 불친절하기까지 한) 연출 방식, 장면의 밀도, 편집의 속도, 화면의 구성 방식까지 여러 측면에서 이 콘텐츠는 여전히 ‘영화적’이다. 동시에 전통적인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이경미 감독 스스로 밝혔듯 이것은 장편영화 세편하고도 절반 분량의 이야기다.

에피소드마다 원작의 에피소드 2개씩을 겹쳐 풀어냄으로써 다음 화가 궁금해지게 만들었다는 것, 아끼는 에피소드인 ‘오리 선생 한아름’을 따로 풀어내기 어렵자 조각내어 모든 에피소드에 양념처럼 흩뿌려두었다는 점 등 곳곳에서 드라마 형식에 맞춘 구성 방식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영화를 영화로 성립하게 만드는 물리적 조건은 딱 2가지다. 하나는 극장, 다른 하나는 (한 호흡에 진행되는) 상영시간. 넷플릭스 드라마 <안은영>은 두 가지 조건에서 자유로우므로 당연히 영화가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안은영>에서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의 점액을 보듯이 영화의 흔적과 욕망을 발견한다. 영화의 경계가 흐려지고 넓어지고 흩어질수록 새삼 되묻게 된다. 영화란 무엇인가. 자리가 바뀌어도, 익숙한 이야기를 원작으로 가져와도 이경미는 여전히 이경미스럽다. <안은영>은 더욱 폭넓은 관객층을 겨냥한 연출자 이경미의 야심작이나, 사랑받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진 않는다. 도리어 잘할 수 있는 것들을 갈고닦아 견고하게 성을 쌓는다. 이경미 영화의 마법의 주문을 하나만 꼽자면 아마도 ‘소리’일 것이다. <안은영>에서 이경미는 여전히, 아니 더 과격하게 사운드를 충돌시키고 현실 세계의 견고한 정상성에 균열을 내며 즐거워한다. 그 태도가 여전히 심술 맞고 고약하고 이상해서 더욱 미덥다. 안은영 역시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 꾸미기보단 타고난 그대로, 할 일은 하면서 툴툴댄다. 그 지랄 맞은 태도는 오래 곁에 두고 지켜봐야 예쁘고, 안은영의 불균질한 면모들이 점점 사랑스러워질수록 애틋함도 더한다. 삶도, 영화도 마찬가지다. 상황이 어찌됐건 스스로를 속이진 않는다는 것. 피할수 없는 일은 당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 스크린의 자리가 좁아지는 시점에 스크린을 벗어날수록 한층 영화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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