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기가 <테넷>처럼 자꾸 돌고 돌죠?” 2년 전 크리스토퍼 놀란 덕후들의 영화 만들기를 그린 <어둔 밤>으로 데뷔한 심찬양 감독이 음악영화로 돌아왔다. 그는 주연배우이자 음악감독 홍이삭과의 오랜 인연에서 비롯된, <다시 만난 날들> 제작기의 복잡한 타임라인을 설명하며 <테넷>을 소환했다. 지원(장하은)을 보기 위해 과거의 공간을 찾은 태일(홍이삭)이 중학생 밴드 디스토리어를 만나 음악으로서 각기 다른 시간을 표현하고 중첩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다시 만난 날들>은 과연 시간의 마술사 놀란 감독의 팬이 만든 작품답다. 이 영화엔 “사람들이 무언가에 빠져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며 스스로를 “덕후들의 덕후”라 칭한 심찬양 감독만의 감성 또한 담뿍 묻어 있다. 당연하게도, 그와의 인터뷰에서 그 자신이 누구보다 영화와 음악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덕후로서 <테넷>은 어떻게 봤나.
=어제도 친구들과 <테넷> 이야기를 했다. 정서적 충격이 너무 컸다. 이해하기도 어려운 이야기로 끊임없이 새롭고 엔터테이닝한 체험을 하게 해주는 놀란 감독이 너무 대단하다. 이제 지지를 넘어서 그의 심정에 일치하고픈 마음까지 느낀다! (웃음)
-<다시 만난 날들>의 원안은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이어지는 세 친구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창작 뮤지컬 <러브 트릴로지: 청춘>이다. 대학에서 친구들과 함께 만든 창작 뮤지컬로 2011년 초연 후 2016년엔 대학로에서도 공연했다. 어떻게 만든 작품인가.
=학교에서 뮤지컬 수업을 들으면서 뮤지컬을 직접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본도 없었는데 친구들을 캐스팅하고 다녔다. 1월에 대본을 쓰고 2월에 연습을 해서 3월에 공연을 올리면 되는 건 줄 알았다. (웃음) 홍이삭이 만든 노래 <노잉유>를 바탕으로 친구 한명과 극을 썼고, 처음엔 그 친구가 연출을 하고 나는 연기를 했다. 대학로에서는 내가 연출을 했다. 재밌는 음악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항상 있었는데 뮤지컬을 보신 분들이 영화로 만들어도 재밌겠다는 말씀을 많이 하셔서 영화로도 만들었다.
-영화는 30여년이 아닌 몇달 정도의 시간만을 조명한다. 대신 필름카메라로 찍은 빛바랜 사진과 스마트폰으로 찍은 세로형 틱톡 영상이 뮤지컬의 시간성을 구현한다. 원작의 무엇을 가져가고 무엇을 달리하고 싶었나.
=뮤지컬에 쓰인 노래 세곡, <노잉유> <설렘> <재회>는 그대로 들어갔다. 곡에 담긴 정서는 바꿀 수 없기에 영화에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오래전 함께했던 두 사람이 재회해서 미묘한 감정을 다시 느낀다는 내용 빼고 이야기는 거의 다 새로 썼다.
-홍이삭 배우는 뮤지컬에 이어 이번 영화의 음악감독과 주연도 맡았다.
=13년 정도의 인연이다. 처음에 학교의 실력자들이 모인 영어 찬양팀에서 이삭이를 만났고, 이삭이가 작곡한 노래도 들을 수 있었다. 그 후 이삭이가 <노잉유>를 썼고, 그가 버클리음대를 다니다 휴학하고 돌아왔을 때 같이 뮤지컬을 만들었다. 이삭이는 계속 음악으로 이름을 알리려 했고, 나는 뮤지컬도 만들고 단편영화도 만들고 지내다가 이삭이의 뮤직비디오도 찍어주고 그랬다. 그러다 지난해에 이삭이가 JTBC <슈퍼밴드>에 출연하면서 처음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게 된 거다. 그때 이 영화 준비와 오디션 프로그램을 병행하면서 이삭이가 많이 힘들어했다. 이 음악의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이삭이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건데 여러 상황이 참 어려웠다. 더 준비를 했다면 덜 힘들지 않았을까 싶지만, 13년이라는 시간의 관계와 작업의 결과물이 이 영화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배우 서영재를 제외한 밴드 디스토리어의 세 멤버(배우 장다현, 양태환, 차민호)와 지원을 연기한 기타리스트 장하은 또한 실제 연주 실력이 뛰어난 음악인들이다.
=배우들이 음악적으로 밸런스가 안 맞으면 이도저도 아닌 영화가 될것 같았다. 음악하는 분들을 찾으려 유튜브를 계속 보다가 캐스팅했다. 밴드 보컬 덕호를 연기한 서영재 배우에게도 오디션에서 노래를 시켰다. 오디션에서부터 이미 너무 ‘멋있음’이 내재된 다른 아역배우들보다 노래에 진심을 담을 줄 아는 친구다 싶어 캐스팅했다.
-성인과 청소년이 나오면 그 구도에서부터 빤한 전개가 예상되기 마련인데, <다시 만난 날들>은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기본기’를 가르쳐줄 수는 있지만, 그걸로 아이들의 세계를 잠잠하게 만들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이들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른들의 눈치를 보긴 본다. 실력으로는 눌린다는 걸 너무 잘 아니까. (웃음)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만의 길을 간다. 심지어 덕호는 자기가 한 말을 다 지킨다. “프로그레시브하면서도 한국적 비트를 가미한” 음악을 정말 보여주지 않나. 촬영하면서도 아이들이 행복한 현장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둔 밤>은 동생들을 데리고 찍어서 “빨리빨리 막 해!”라고 소리치며 진행했는데, 이번에는 나도 놀랄 정도로 유해졌다.
-특히 태일이 덕호에게 작곡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지질하지 않으면 아무 노래도 쓸 수 없어”라고 말해주는 대사가 마음에 꽂혔다.
=관객은 살아 있는 사람을 보기 위해 극장에 오지 않나. 인물이 자기가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할 법한 모습을 보여줄 때 관객은 그 인물을 진짜로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그런 면에서 지질함이란 솔직함이라 생각하고 나온 대사로 기억한다.
-심찬양 감독은 어떤 중학생이었나.
=록 덕후였다. 이번 영화에 지원의 삼촌이라면서 사진으로 잠깐 등장하는 조필성님과 그의 밴드 예레미의 엄청난 팬이었다. 중학생 때 아침마다 세 시간씩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보냈고, 음악에 나오는 베이스라인을 포함해 모든 소리를 외웠다. 내가 음악을 못하는 척했는데 여기서 최초 공개하겠다! 대학생 때는 반년 정도 밴드를 제대로 한 적도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자료 화면을 보여주며) 사람들이 나인지 모르게 어떤 멋진 밴드인 것처럼 영상도 올렸다.
-<어둔 밤>에 이어 <다시 만난 날들>에서도 좋아하는 것에 열중하는 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와 함께 즐긴다는 감각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덕호가 태일에게 “록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은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었을 때”라고 하지 않나.
=내가 술을 안 마시기 때문에 정말 뒤풀이로 떡볶이를 먹으러 가곤한다. 그런 순간들이 기억에 오래 남더라. 사소한 순간들의 힘이 제일 센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하는 친구들이 괴상하고 이상한 짓을 할수록 더 즐겁다.
-영화에서 인물들이 함께하는 몇 장면은 실제와 환상이 뒤섞인 것만 같았다. 마치 혼자 남았을 때의 외로움이 만들어낸 부산물처럼 느껴졌다.
=의도적으로 진짜인지 꿈인지 모르도록 찍은 장면들이 있다. 이렇게 들으니 외로움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데, 내가 좀 희한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를 그만둔다면 볼 일이 없어질지도 모르는 친구들이 가득하다. 그러다보니 결국 내가 같이 일했던 친구들과 놀고 싶어서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다음 영화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나.
=아직 모르겠다. 영화라는 것이 존속할 수 있을지부터 다시 고민을 해봐야 하는 시점인 것 같다. 더 잘 찍고 못 찍고를 떠나서, 더 재밌고 더 많은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