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째 머리털 정리를 스스로 하고 있다. 그 시작은 이랬다. 더운 날씨에 머리를 더 짧게 자르면 시원하지 않을까 싶어서 반삭발을 결심했는데,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르는 일이라면 굳이 전문가의 손에 맡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전기이발기를 알아보고 주문했다. 덕분에 ‘바리깡’은 프랑스의 제조 회사 이름인 바리캉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사람이 쓰는 전기이발기와 애견용 이발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튼 새 이발기를 머리털에 갖다 대기 전에 그래도 기술을 배워두는 게 좋겠지 싶어 동영상을 검색했다. 검색어 ‘셀프 이발’을 입력하니 꽤 많은 영상이 떴다. 세상에 스스로 머리털을 자르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단 말인가. 과연 속담처럼 제 머리를 못(안) 깎는 건 스님뿐이구나. 다양한 자가 이발 영상을 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어쩌면 기술보다 필요한 건 용기였는지도 모른다.
미용실과 관련해서 뼈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몇년 전 생일을 앞두고 단골 미용실을 찾았는데 불상사가 발생했다. 미용사가 가위로 내 오른쪽 귀 끝을 자른 것이다. 미용 가운 위로 빨간 피가 뚝뚝 떨어졌다. 바로 근처 병원에 가서 응급조치를 하고, 상처를 꿰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가위에 귀가 잘릴 때 그 생생한 느낌이 잊히지 않고 계속 떠오르는 후유증으로 한동안 누군가에게 머리를 맡기길 주저했고, 미용실을 가도 계속 긴장을 했다.
이제는 타인의 손에 맡기지 않고 가위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전한 이발기를 쓰니 그런 긴장감은 옅어졌으나 다른 위험 부담이 생겼다. 열악한 실력으로 인한 실수의 결과를 온전히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은 실력이 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뒤통수를 자르는 일만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잘 보이지 않으니 온전히 손의 감각에만 의존해야 한다.
스스로 머리털을 관리하기 시작한 이후로 사람들이 내 머리를 이상하게 보거나, 지적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어 다행이다. 내 실력이 나쁘지만은 않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내 머리에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높은 가능성으로 후자일 것이다. 기시미 이치로가 쓴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내가 아는 젊은 친구는 소년 시절에 거울 앞에서 오랫동안 머리를 빗는 습관이 있었다는군. 그러자 할머니께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 ‘네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너뿐이란다.’ 그날 이후로 그는 삶이 조금 편해졌다고 하더군.”
하지만 이런 사소한 용기와 위안에도 이면은 있다. 내가 이 정도로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내가 남성이기에 누릴 수 있는 편의다. 사실 더 나아가 삭발을 한들 거리에서 누구의 시선을 끌지도, 그들에게 어떤 의문조차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남성의 머리 길이에는 파격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당장 거리에서 삭발한 여성을 발견한다면 사람들은 이미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 여성이 그 머리를 하기에 적절한 사연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