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을 읽을 때면 늘 신기하다. 나와 이렇게 (안 좋은 의미에서) 비슷한 사람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마음으로 신기해하리라는 생각을 하면 아득한 연결감에 즐겁기도 하고 감탄하게도 된다.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캐럴라인 냅과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서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알기 때문에’ 연락을 하기 어려워질 것이고 그래서 친구가 아닌 사람들보다 머나먼 사이로 지냈을테지. <명랑한 은둔자>는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다.
하지만 또한 많은 것들이 다르다. “나는 중상층 가정에서 자랐고, 사립 중등학교를 다녔고, 아이비리그 대학을 다녔다. 예뻤고, 인기가 좋았고, 성적이 올 에이였고, 학업 우수상을 많이 탔다.” 하지만 캐럴라인 냅은 자신에게 생기는 모든 좋은 일들이 모두 외부적 요인의 산물이라고 생각했다. 우연이거나 행운이거나. “내 마음속에서 나는 흠이 있는 사람이었다.” 캐럴라인 냅은 평균보다 훨씬 뛰어난 재능을 갖고 여유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그런데 왜?”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알지 못하고서. 다른 사람의 평가와 말에 갇혀 사는 일도 어렵지만, 자기 생각 속 형편없는 자기 이미지에 갇혀 사는 일 역시 그렇다. <명랑한 은둔자>에서 캐럴라인 냅은 자꾸 시간을 세며 글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5년 전에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10년 전 1월에, 나는 섭식장애 전문가를 찾아가서 치료받기 시작했다.” “1985년에는 몸무게 재보는 일을 그만두었다.” 현재나 미래를 살아가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곱씹는 일부터 해야 하는 이 작가는, 아마도 이상적인 자신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될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인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동시에, 캐럴라인 냅은 그런 자신과 잘 지내기 위해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자족하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력을 멈추지 않으리라는 생각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는 일이 유일하게 통제 가능하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생겼겠다 싶다. 그래서, 캐럴라인 냅의 글이 자기 얘기 같다는 친구를 보면 마음 어딘가에 꽉 조여 있을 나사를 풀어주고 싶다. 아마 내 친구들도 나를 보고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