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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탄제린>
김송희(자유기고가) 사진 백종헌 2020-09-22

크리스틴 맹건 지음 / 이진 옮김 / 문학동네 펴냄

모로코 탕헤르의 앨리스는 어느 날 아침 집 앞에 찾아온 친구 루시를 보고 흠칫 놀란다. 미국에서 함께 대학을 다녔던 루시,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던 영혼의 단짝 루시와 헤어지고 남편 존을 만나 아프리카까지 떠나왔는데, 루시가 어느 날 앨리스의 집 문을 두드린 것이다. <탄제린>은 1950년대 모로코를 배경으로 루시, 앨리스 두 여자의 시점이 번갈아 서술된다. 둘 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공통점으로 금세 친해졌지만, 사실 루시와 앨리스가 처한 환경은 다르다. 가난한 장학생인 루시와 달리 앨리스는 신탁 수표가 매달 기숙사로 배달된다. 부모님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앨리스를 그녀의 고모는 미국으로 떠나보냈고 앨리스는 여전히 자기 상태에 대해 갈팡질팡한다. 고모로부터 ‘너는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듣고 자란 앨리스는 타인에 의해 쉽게 휘둘리고 자책한다. 사실 루시가 바라보는 앨리스는 그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출중한 여성이지만 앨리스가 화자가 된 페이지에서 그녀는 자신을 박하게 평가한다. 루시는 명확한 어휘를 구사한다. 그녀는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방향에 대해서도 확신이 있다. 하지만 앨리스는 수동적이고, 루시가 자신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도 도망치고 싶을 뿐이다. 앨리스는 남자 친구 톰이 죽게 된 사고가 루시 때문이라고 확신하지만, 루시를 집착이 심한 괴물로 둔갑시키는 것이 망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이 소설을 “도나 타트와 길리언 플린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고 히치콕이 연출한 작품 같다”고 극찬했다(조지 클루니 제작으로 영화화가 예정됐다). 무엇보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것은 멍청한 남편 존을 살살 약올리는 똑똑한 루시, 그리고 그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연약한 ‘멘탈’의 앨리스를 지켜보는 일이다. 전 생애를 거쳐 가스라이팅을 당한 여자의 심연을 들여다봤다가, 뭐든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강건한 여자의 속셈을 엿보는 일은 역시 흥미롭다.

그런 여자

앞서 존이 앨리스를 모욕했던 부분을 들먹이며 내가 따져 물었다. 그리고 마음이 바뀌기 전에, 내가 스스로를 자제할 틈을 주지 않고 말해버렸다.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얘기를 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것보다 더 민감한 사안이 뭐가 있죠?” (중략) “아.” 그가 말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도 그런 여자들 중 한명이군요.” 나는 의도적으로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여자들이라니요?” “아시잖아요, 그런 여자들.” 그가 술을 크게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주방을 박차고 나가자느니, 뭐 그런 거요.”(5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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