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동실에 처박혀 있던 딱딱한 식빵을 꺼내 토스터기에 넣었다.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그래서 데울 생각도 없었는데 충동적으로 토스터기에 넣어버린 작은 빵 한 조각. 집 안에 고소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나는 약간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부드러운 빵을 한입 베어 무는 상상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기대. 어떤 충만한 기대감이 나를 에워싸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기분일 때의 나 자신을 잘 안다. 대체로 재미있는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경험했을 때 이렇다. 흥분 상태인 것이다. 훌륭한 작품들을 통해 얻는 감정은 조금 특별하다. 뭘 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뭔가를 봤을 뿐인데, 희로애락의 범위가 확 넓어지니까. 정말 그렇다. 예상치 못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되짚어보기도 하면서 나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지난 이틀간, 나는 이런 감정을 이끌어내는 좋은 작품을 봤다. 바로 드라마 <이어즈 앤 이어즈>.
사실 2화까지는 좀 심드렁했다. 재미있긴 했지만 그렇게 집중하지는 못했다. 80년대에 태어난 (영국의) 주인공들이 현실을 개탄하는 장면을 볼때는 솔직히 별로 공감이 안됐다. 지난 30년간 세상이 평온했다고? 정말? 뉴스를 보는 게 지루했다고? 이 세상에 별일이 없었다고? 나도 80년대에 태어났는데, 아… 그래? 게다가 나는 가족끼리 모든 일을 공유하며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는 게 적응이 잘 안됐다. 아버지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네 남매의 우애가 돈독해졌다는 설정이 머리로는 이해됐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 집은 무슨 가족 통화를 저렇게 많이 해? 하지만 이런 건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시시한 감상이었을 뿐이다. 통화 중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인물들의 성격과 갈등은 어쨌든 흥미로웠고 웃기기도 했다. 그래, 돈독한 건 돈독한 거고, 미운 건 미운 거지. 싫은 사람이 먼저 전화 끊는 거지. 게다가 해를 거듭하며 달라지는 세상사와 가족사의 뒤얽힘이라니, 얼마나 흥미로운 소재인가. 심지어 배경은 미래였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은 가족극 한편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고,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그러다 점점 드라마에 빠져들었고, 시간을 잊었고, 마지막 화를 볼 때는 덜덜 떨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무섭다. 진짜 무서워.”
35년 전, 친할아버지는 거의 손도 써보지 못한 채로 돌아가셨다. 그렇게 들었다. 위암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말을 듣기 시작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까지 속수무책은 아니었을 거야.”나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12살에, 같은 병으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년 전부터 나는 그때의 어른들과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요즘 같으면 달랐을 거야. 조금 더 체계적으로 항암치료를 받았을 거야. 표적치료도 했겠지. 약도 좋은 걸 썼겠지. 보험 혜택도 더 받을 수 있었을 거야. 수월하지는 않아도, 무력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올해 들어, 나는 이런 생각을 거의 안 하게 됐다. 기술의 발전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상상의 영역을 넘어서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재앙’의 수준 역시 진일보한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반대인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어쨌든 나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고, 어린 시절 느낀 무력감과 올해 느낀 허탈함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세상이라고 해서 정말 괜찮았을까? 가능했을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걸 막을 수 있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이어즈 앤 이어즈>에서 느낀 공포는 바로 이 감각에서 기인했다. 그런 것 같다. 이 드라마가 다루는 미래는 2019년에서 2034년인데,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계급격차, 극우주의 대두, 자연재해, 난민 문제, 식량 문제, 빈곤, 차별, 혐오, 멸종 등등. 어느 정도는 이미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기에, 보고 있으면 그 핍진함의 농도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주인공들의 인생은 국가 정책에 따라 한없이 휘청거린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묵묵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던 중산층 시민들이다(음, 이디스는 제외하자). 그들은 직장에 나가고, 가까운 사람들을 챙기고, 일년에 한번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 지루하고 평화로운 삶은 존재할 수 없다.
물론 일상은 이어진다. 원래 삶이 그렇지 않은가. 뭐가 어떻게 되든 사람에게는 삶이 있다. 어떻게든 살긴 산다. 내가 공포를 느낀 지점은 바로 여기였다. 배경이 악랄해질수록 인물들의 삶은 점점 더 극적으로 변모한다. 그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을 감내하며 어떻게든 산다. 적응하고, 인내하고, 나아질 방법을 찾으며 계속 산다. 그리고 가족 통화를 하며 한탄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눈뜨고 뉴스를 볼 수가 없어. 무서웠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화는 ‘미래’에서 이루어지지만, 나는 그걸 ‘현재’ 그러니까 그들의 ‘과거’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한 과거. 또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감염병 위기 경보 단계가 격상된 바로 오늘.
그래서 나는 냉동실에서 빵을 꺼냈다.
지난 1268호 칼럼에서 나는 잘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슬럼프를 유발하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생각해보면 그 마음 역시 결국 ‘미래’ 때문이다.‘내일’은 늘 불안했다. 안 그랬던 적이 없다. 그게 미래가 존재하는 이유 같았다. 알 수 없기에 더 겁이 났고, 그래서 뭐라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 오늘을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늘 일어났고, 막을 수 없는 일들은 너무 많았다. 그런데 내가 하는 일마저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잘 쓰지 못한다면?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 이야기는 현실을 따라갈 수 없다는데, 내가 바로 그 현실의 주인공이 되겠지. <이어즈 앤 이어즈>는 간신히 덮어둔 이 불안감의 실체를 폭죽처럼 터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루하다고 말하는 게 지겨워졌다. 아니,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버렸다. 지루할 수 없었다. 무서웠고, 놀라웠고 다음에는 궁금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무서웠던 건지 찬찬히 곱씹어보았다. 인물들의 첫 등장을 떠올렸고, 극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생각했다. 그 일화 덕에 기억난 역사의 실제 사건들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인상적인 대사가 등장하는 부분을 돌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는 “스토리텔러”라는 직업을 가진 프랜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녀는 주인공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돈을 받죠.” 뭔가 의아해하는 듯한 그에게 그녀는 덧붙여 설명한다.
“(저는) 이야기의 형태와 필요성을 일깨워줘요.”
덕분에 적어도 오늘 나는, 확실히 깨달은 것 같다. 토스터기의 알람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