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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온: 저주의 집'이 그려낸 미래 없는 지옥도에 대하여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 라인]

<주온: 저주의 집>은 여러 의미로 보기 힘든 작품이었다. 그 징그러운 인상에 대해 숙고해보았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들

<주온: 저주의 집>

왜 다시 저주받은 집이 돌아와야 하는가. 미야케 쇼가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 <주온: 저주의 집>(이하 <저주의 집>)은 역한 공기로 가득하다. 3시간 남짓 되는 시간으로 완결된 이 시리즈가 집요하게 보여주는 것은 저주의 연쇄 작용이라기보다는 학대와 폭력, 끝내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잔혹한 장면들이다. 화면에는 수많은 살인과 시체가 단조롭게 늘어선다. 이렇게까지 보여주어야 할까, 라고 반문하고 싶을 정도로 영상이 제시하는 폭력의 강도는 장르영화 특유의 관습을 고려하더라도 과도하게 다가온다. 그런 불쾌한 느낌이 드는 건 단순히 잔혹한 표현의 수위 때문만은 아니다. <저주의 집>은 노골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폭력을 전시한다. 이 드라마에서 폭력에 노출되는 대상은 주로 여성과 미성년자, 심지어 어린아이와 신생아들이다. 거의 악의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선별과 취사선택이다.

에피소드1의 초반부에서는 이름 모를 남자(‘M’)가 조수석에 앉은 여자아이를 느닷없이 폭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유아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은 뒤늦게 밝혀지는데, 그러나 우리는 이 남자가 저주받은 집에 들어선 적이 있다는 사실 외에는 어떠한 행위의 정황이나 근거도 얻지 못한다. 그의 폭력은 서사적 당위가 부여되지 않는 그저 과잉된 폭력으로만 묘사되는 것이다. 이 장면은 하나의 전조처럼 지시된다. 인물들은 본격적으로 이유 없는 폭력을 수행하고, 예정된 죽음의 자리에 도달할 것이다. <저주의 집>이 착취적이고 혐오적이며 퇴행적인 면모를 함의하고 있다는 지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연출자는 뻔뻔스럽게도 그 모든 불쾌한 요소들을 긁어모으고 있다. 미야케가 그리는 드라마 속 시기(1988년에서 1997년까지)의 일본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사회적 규범이 파산되었고, 사악한 범죄와 무기력한 죽음이 전염병처럼 공기중에 떠다니는 세계다.

비인격적인 저주의 재생

구로사와 기요시의 말을 빌리면 공포영화는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우리 주변에 혼재하고 있음을 환기하는 장르다. 우리 바깥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또한 우리 내부에 기억에서 지워진 구멍이 존재한다. 외부에 드러난 유령의 표상과 내부의 구멍은 내밀한 흔적의 공유로 연결되고, 눈앞에 주어진 단서는 기묘하게도 ‘나’의 흔적과 맞물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포영화의 주인공들은 일상적 세계와는 다른 작동 원리를 새로 알게 되는 자들이면서 또한 기억을 잃어버린 이들, 과거라는 시간의 더께를 망각한 자들이다. <저주의 집>의 주인공인 심령 연구가 오다지마가 저주의 집과 관련된 이야기와 현상들을 수집하면서, 자신이 어린시절에 그 집에 살았었다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인물들이 서사를 움직이는 방식은 지질학적인 탐사의 방식과 유사하다. 기묘한 현상을 두눈으로 마주한 이들은 그것의 흔적과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은 시지각적 감각으로는 지각되지 않는, 그러나 그들의 일상을 에워싸는 회로의 원리에 근접한다.

<저주의 집>이 형성하는 저주의 회로는 단순하지만 치명적인 동어반복의 현상을 구성한다. 저주의 집에 들어선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 저주를 받은 자들은 죽거나 누군가를 죽이게된다. 혹은 벗어날 수 없는 회로 속에 갇혀 증발하거나 저주의 집에 돌아와 실종된다. 특별한 내용이라고 할 것은 없다. 미야케는 이 끊이지 않는 저주가 무엇으로부터 발원한 것인지 파헤치는 데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결론을 말하면 1950년대에 벌어진 납치 살인 사건이 그 근원이다. 극중 형사가 들려주는 기록에 따르면 임신 중인 여자는 살해당했고 아이는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오다지마는 이야기를 옮기는 작가일 뿐 저주의 근원을 충실히 해명하는 데 자의식을 갖는 탐정이 아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다 보고 난 뒤에도 우리가 본 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였으며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해명되지 않는 허무함과 의문이 계속된다. 6부작으로 구성된 시리즈의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통틀어 미야케는 단지 일상적인 삶의 안위를 해체하는 파국적 회로를 반복해서 상연할 뿐이다. 1950년대에 벌어진 납치와 강간 살인, 여인의 죽음과 아이의 실종이라는 끔찍한 사태를 말이다. 매번 인물들의 등 뒤에 나타나는 유령의 형상처럼 그 선행된 결과는 일찌감치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저주의 집>은 일본이 처한 시대적 악몽에 대한 역투시도법을 설정한다. 공간이 인물을 먼저 마주하고, 과거의 유령이 우리를 지켜본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서서히 저주의 인력에 휩쓸리는 개별 인물들의 궤적이 아니라, 저주받은 집에 들어선 모든 인물을 감염시키는 비인격적인 저주의 ‘재생’이다. 저주의 범위에 붙들린 인물들의 우연한 마주침과 엇갈림은 서사의 인과적인 체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이야기를 전달하는 오다지마가 유일하게 살아남는 건 이야기꾼이 남겨둔 자조적인 농담에 가깝다. 목적도 모른 채 그저 이야기를 옮겼다는 이유로 살아남는 주인공이라니). 그러한 연쇄적 고리는 개인의 근시안적인 시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폭력과 죽음에의 충동은 클로드 샤브롤의 말처럼 빗방울이 내리듯이 사람들의 피부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다.

이러한 문제는 역설적으로 범죄의 불투명한 면모를 상정한다. 범죄는 누가 저지르는가. 죄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 물론 그것은 현재 시점에 행위를 저지르는 인물들에게 배당되지만, 이는 또한 과거로부터 건네진 것이다. <저주의 집>에서 유령은 누구의 형체로도 수렴되지 않는 대상이다. 에피소드5에서 어린 오디지마가 보는 검은 여인의 형체이거나, 에피소드6의 마지막에 천천히 다가오는 초점이 흐릿한 유령의 얼굴이다. 저주는 누구의 얼굴로도 현현할 수 있다.

저주에 깃든 자들은 자율성을 가진 구체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이의 행위를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종속적 개체로 회로 내부에 자리매김한다. 장 루이 뢰트라는 공포영화의 판타스틱한 문양들을 분류하면서 ‘전염성’이라는 제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는다. “어떻게 한 인격이 다른 인격체로, 한 인물이 다른 인물로 이행하며 전이되는 과정을 눈앞에 보여줄 수 있을까?” <저주의 집>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행위는 일관되게 심리적 동기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은 저주가 작동하는 내막을 알 수 없다. 단지 전화기로 사람을 내리치는 행위를, 임신부의 배를 가르는 충동을, 마당에 신생아를 묻는 의례를 반복해서 수행할 뿐이다. 집에 침입한 이들에게 깃든 이러한 내면 없는 행위의 연쇄가 반복되는 저주를 드러낸다.

<주온: 저주의 집>

그들이 수행하는 것은 단순히 잔혹한 행위라고 말하기 어려운 제의적 절차에 다름 아닌데, 왜냐하면 그건 구멍 난 틈을 일으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표면이 잘린 인간 신체, 벌어진 입과 눈동자, 몸을 감싸는 미세한 막을 찢고 나오는 태아, 순식간에 땅 밑으로 증발하는 몸…. 이런 끔찍하고 기이한 현상들은 금지된 것 저편의 어둠으로 인물들을 데려간다. 눈앞에 들이닥친 구멍 난 틈으로 탈각된 기억의 단편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이는 인물이 주체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이라기보다는 가시적인 것 너머의 기억이 인물의 몸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현상에 가깝다. <저주의 집>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집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진다. 모든 원한이 시작되고 살인과 죽음이 일어나는 장소. 그곳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에피소드5와 6에서 이 장소는 복잡한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에 난입하는 무대로 탈바꿈한다. 그곳에서 새로 이사 온 임신부는 살해당한 50년대 여인의 얼굴로 변하고, 그녀의 남편은 오다지마 아버지의 얼굴과 교란되며 과거 오다지마의 아버지가 사라진 것과 같은 자리에서 증발하고 만다.

집단적 망각을 환기하는 영상의 권능

우리는 누구의 죽음을 보는 것일까. 죽은 자는 과연 누구인가. 여기서 주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건 이러한 중첩된 죽음이 영화적 표상에 근본적인 혼란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주의 집>에 대한 몹시 통상적인 해석(‘1980~90년대 일본 사회에서 벌어진 실제 범죄를 차용하면서 시대에 깃든 불안과 공포를 저주받은 집 이야기에 압축적으로 옮겨왔다는 지적’)은 절반만 옳다. 이러한 지적이 놓치는 것은 <주온>이 보여주는 현실의 범죄가 불명확하게 제시된다는 측면이다. 오직 미디어의 화면으로만 나타나는 범죄의 기록들. 더군다나 그러한 뉴스 영상에서는 죽음의 관계가 제대로 표상되지 않는다. TV는 기요미의 어머니가 살해당한 사건을 보도하면서 유다이나 기요미가 아닌 그들의 고등학교 선생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니 이러한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은 차라리 범죄를 기록하는 영화적 표상의 혼란이다.

이는 앞서 거론한 범죄의 불투명성이라는 주제와 시각적으로 공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환언하자면, <저주의 집>이 추동하는 시대의 불안은 온갖 범죄와 살인 사건으로 만연한 사회적 불안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범죄로 인해 발생한 재앙의 풍경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영상의 표상적 불안이기도하다. 이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일본 사회의 수많은 범죄로 얼룩진 시기라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 범죄는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엄밀히 누구의 가해였다고 말할 수 있는가. 피해자의 눈에 비친 끔찍한 공포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 이를 질문하는 건 도덕적으로 불순한 시도이면서 동시에 표상의 금기를 넘어서는 영화의 근본적인 기능이다. 너무 끔찍한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 기억에서 지워진 것들, 공유될 수 없는 시대의 잔여물들을 허구의 세계 위에 가시화하는 욕망의 실현인 것이다.

시체를 보여주려는 욕망은 일차적으로는 장르영화의 스펙터클이자, 더 나아가서는 카메라의 근원적인 호기심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는 표상의 불안에 대응하는 가장 끔찍하고 냉소적인 방법일 것이다. 미야케 쇼는 너무나도 잔혹하기 때문에 아무도 직시하지 않은 시체들로 화면을 채워넣는다. 그것은 50년대에 다락방에서 실종된 아이, 흔들리는 땅 밑으로 증발해버린 아버지처럼 시체 없이 사라진 이들의 기억을 떠올린 자들의 불가피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이는 집단적 망각의 역사를 환기시키는 장치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영상의 권능을 과시한다.

90년대 일본 사회를 도덕적 규범이 붕괴한 폐허의 시기로 지목하는 것은 영화사적으로 <주온>이 가지는 특별한 관점은 아니다. 가령, 이러한 역사적 입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로 아오야마 신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는 (<저주의 집>에서도 거론되는) 1995년에 벌어진 옴 진리교 사건에서 이야기를 착상했다고 밝힌 두편의 영화, <차가운 피>와 <유레카>에서 일본을 거대한 암흑지대로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들에서 거대한 터널의 어둠, 기나긴 버스의 여정이 등장하는 것은 그래서다. 아오야마의 영화에서 그러한 90년대의 어둠을 통과 중인 인물들은 근본적인 공백을 지니게 된다. <차가운 피>의 형사는 어둡고 긴 터널 속에서 범죄자가 쏜 총에 맞아 한쪽 폐를 훼손당하고, <유레카>의 남매는 버스 납치 사건에 휘말린 이후로 실어증 상태에 빠져 있다. 1964년생인 아오야마가 선택하는 것은 그럼에도 어떤 희망을 회복하는 순간이다. 20세기를 지나치고 다음 세기의 시작점에 만들어진 <유레카>의 마지막, 세계의 색채와 아이의 미소가 함께 복권되는 놀라운 결말로 향하는 것이다.

미야케 쇼는 반대로 아오야마가 설정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뒤, 스스로 구축한 영화적 세계에 절멸의 공기를 드리운다. <주온>은 결국 불모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땅에 묻히고, 학대와 방치 속에서 살아남은 도시키는 들어주는 사람 없는 병실에 누워 도망치라는 말을 속삭인다. 다음 세대에 건네줄 희망은 없다. 모두 죽거나 말을 잃어버리는 게 전부다. 저주받은 집과 관련된 사건들을 추적하고 수집한 오다지마는 마지막으로 찾아온 형사에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은 아이를 가지지 않을 계획이라고 말한다. 오다지마는 저주가 펼쳐지는 과정에 입회하면서,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증발을 떠올리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아버지가 되기를 포기한다.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다. 아이들의 시체가 묻힌 땅 위에서 그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아니면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이러한 냉소적인 결말을 온전히 연출자 미야케의 선택으로 환원하기엔 다소 애매한 측면이 있다(오리지널 <주온> 시리즈에서부터 참여한 각본가 다카하시 히로시의 영향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나의 가설이지만 그럼에도 미야케 쇼의 <주온>이라는 작업의 흥미로움은 분명 이와 같은 절망적인 비전에서 발견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어떤 자기 파괴적인 욕망이다. 1984년생인 미야케 쇼는 90년대 일본이라는, 자신이 지나온 유년기의 풍경을 미래 없는 지옥도로 그려낸다. 그리고 자신들의 세대가 태어나지 않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 만들어진 <주온>은 무능한 아버지의 자리를 지우기 위해 자기 몸을 불태우는 아들의 시도, 아버지의 입안으로 기어들어가 구멍을 찢어버리는 신생아의 발악. 죄의 고리를 대물림하려는 아버지들에게 중단을 요구하는 동반자살의 보고서다. 이러한 파열의 시도는 아오야마 혹은 각본에 참여한 다카하시처럼 90년대를 의식적으로 통과한 세대가 아니라, 미야케와 같이 그 시기를 파편적으로 기억하는 이들에게서 발현되는 시각일 테다. 몸 한가운데 구멍이 나버린 파국의 시기를 향한 고통스러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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