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을 처음 읽었다. 꽤 외설적인 이 작품이 일본 사소설의 대표작임을 알고 조금 충격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사소설의 역능과 정치적 기획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소설’은 자신의 ‘치명적인’ 경험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작가 스스로 낱낱이 밝힘으로써 자신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고백’의 교묘한 역능을 활용한다. 이는 개인의 내면을 해부 가능한, 재현의 매혹적인 대상으로 설정하게 된 근대 일본의 자연주의 및 낭만적 자아상과 관련된다. 사소설이 일본의 특수하고 정치적인 맥락을 지닌 역사적 장르임을 알게 된 후, 나는 단지 작가의 경험이 소설에 반영됐다는 이유로 한국 여성소설들을 비롯한 일부 소설들을‘사소설’이라고 호명하며 폄훼해온 부주의한 비평들에 깊은 의구심을 가졌다.
최근 부상한 개념인 ‘오토픽션’(autofiction)은 어떨까. ‘자서전’을 뜻하는 ‘autobiography’ 와 ‘소설, 허구’를 뜻하는 ‘fiction’ 의 합성어인 이 명칭은 이미 문제적이다. 세간에서는 그저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드러낸 소설’ 정도로 범박하게 쓰이며, ‘일기’나 ‘에세이’등과도 자주 악의적으로 비견된다. ‘오토픽션’ 논쟁은 대개 각각 ‘자서전적 성격’과 ‘픽션적 성격’에 방점을 찍은 두 진영으로 양분돼 진행된다. 이때 손쉽게 다다르는 결론은, 자서전조차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들’이 바로 ‘나의 진실’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나에 대해 쓴 내용’이 아니라, ‘나를 쓰는 행위’ 자체가 ‘나’의 유일한 진실일 수 있다는 것에 오토픽션의 미묘함이 있다. ‘나’를 쓰고자 한다는 욕망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오토픽션이야말로 그 욕망을 발명하는 강렬한 ‘형식’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오토픽션은 고유한 특성을 갖는 ‘장르’로서 정의될 수 있을까? 오토픽션은 여타 소설과의 차별점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오토’를, 그것이 작가의 ‘창작’을 거친 산물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픽션’을 강조한다. 즉 오토픽션은 일기부터 소설까지 망라하는 ‘자기(반영적)서사’ 스펙트럼의 일부이며, 모든 서사는 조금씩 자기반영적이다. 게다가 오토픽션은 결코 ‘나’에 대해서‘만’ 쓰지는 않는다. 나를 말하기 위해서는 나와 관계된 사람들과 내가 연루된 세계에 대한 기술이 필수적이다. ‘오토’가 상정한 ‘나’는 언제나 복수의 주체들과 연루돼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지면이 끝났고 점검할 것들은 더 있다. 한국에서 ‘퀴어’라는 것이 ‘치명적인 비밀’로 여겨진다는 점, 하지만 억압은 ‘퀴어’라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올바른 퀴어’를 재현하려는 ‘동성애규범적’ 사고에도 있다는 점, ‘퀴어’는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퀴어-되기’의 실천을 요하는 수행적인 정체성이라는 점 등에 ‘사소설/오토픽션/자전소설’과 같은 자기서사의 양식은 어떤 벡터로 작동할까. ‘나를 쓴다는 것’이 퀴어문학의 위험하고도 유력한 방식으로 부상한 정황을 생각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