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것을 좋아해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글을 써왔지만 전통적 의미로서의 ‘순문학’에 속하는 소설을 쓰는 일은 피해왔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러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이라고 섣불리 판단해서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을 쓰게 될 경우 낱낱이 드러날 현실의 파편들이 두려워서였다. 내가 쓰고 싶어 하는 어떤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에 간접적으로나마 표현될 인물들이 죽기 전까지는 쓸 수 없을 것이라는 게 나의 개인적인 전망이었다. 그래서 시를 썼고 그래서 SF소설을 썼다. 어디에 발표하지 않는 작품일지라도 그랬다. 한번 글로 표현되고 나면, 그 글 속에서 재구축된 인물들이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인간에서 인물의 지위로 옮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창작자는 이러한 재구축의 함정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짐을 진다. 나는 음악을 만들고 가사를 쓰면서는 이러한 함정을 넉넉히 피해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훨씬 더 구체적이고 핍진성을 요하는 소설이라는 영역에 있어서는 방법을 몰랐다. 어쩌면 나는 겁이 많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거 진짜예요?”라는, 음악을 만들 때조차도 받는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나 자신의 안심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위험한 줄타기가 되곤 하는 예술성에 대한 투신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명확하다.
나는 기꺼이 그러한 투신을 감행하는 소설가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관찰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 새로운 세계가 현실의 인간들을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승화시키리라는 믿음이다. 그 믿음을 부정하는 소설 앞에서, 나의 겁을 하찮게 만드는 소설 앞에서 나는 어리둥절해진다. 작품을 만드는 모두가 이런 겁을 먹은 상태에서 그걸 가까스로 돌파하는 게 아니었나. 그게 약속되어 있는 게 아니었나. 내가 지금까지 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을 오해하고 있었던가.
영화에서도, 사진에서도, 미술에서도, 음악에서도 화두가 되는 재현의 윤리가 글만 피해갈 리 없다. 그것은 사람을 땔감으로 삼는 예술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들은 땔감이나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김봉곤 소설가의 소설을 두고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보면서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내 친구의 얼굴이었다. 어느 창작자가 내 친구의 이야기를 왜곡해 자신의 작품으로 만든 적이 있었다. 그 작품 속에서 내 친구가 누구인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친구가 한 말이 들어가 있었고, 만든 사람의 시선으로 재구축된 친구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친구는 고통을 호소했다. 나는 힘들어하는 친구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글을 읽는 일이 경청하는 일이라면, 더 나아가 모든 예술 작품이 표현과 경청의 완전한 확장이라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나에게 경청이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