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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우수상 수상자 오진우 작품비평 - 사랑이라는 이름의 용기
오진우(평론가) 2020-07-23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에서 사치코의 얼굴이 의미하는 것

3명의 청춘이 클럽에 있다. 이들은 힙합 공연도 보고, 테킬라를 샷잔으로 들이켜며 흥을 돋운다. 사치코가 먼저 플로어를 차지하고 뒤이어 ‘나’와 시즈오도 합류한다. 이들은 DJ 부스 앞에서 파란 조명을 받으며 하나가 된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되고 이들은 클럽 밖으로 나와 흩어져 걷는다. 땀과 피곤함에 전 이들은 전차에 몸을 싣는다. 사치코와 시즈오는 의자에 앉고 ‘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서 있다. 서서 졸고 있는 나의 얼굴 위로 햇빛이 비치고 ‘나’는 잠에서 깬다. 그는 시즈오에 기대서 졸고 있는 사치코를 바라본다. 클러빙 시퀀스 다음으로 영화는 방 안에 앉아 있는 ‘나’와 사치코의 모습을 몽타주한다. 섹스한 후, ‘나’는 담배를 피우고 사치코는 옷을 챙겨 입고 있다. 사치코는 거실로 나가려다 엎드려 있는 ‘나’의 위로 자신을 포갠다. 그러곤 그녀는 그에게 시즈오에 관해 묻는다. 이때부터 사치코의 마음속에 시즈오가 본격적으로 페이드인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3명의 청춘을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중첩한다. 이 중첩된 이미지는 디졸브의 문제로 귀결된다. 디졸브는 궁극적으로 다음 이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영화는 사치코에게 이 선택권을 부여한다. 사랑에 관해서 사치코는 적극적으로 액션을 선보인다. 반면에 ‘나’는 이에 대해 반응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들의 입장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역전된다. ‘나’는 지금까지 숨겨온 자신의 마음을 사치코에게 말로 전한다. 고백을 통해 사랑에 말문이 튼 ‘나’와 달리 사치코는 말없이 얼굴로 반응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얼굴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나’와 사치코의 관계는 시작부터 육체적인 것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사치코의 터치로부터 시작했다. 터치라는 감각은 문자메시지로 번진다. 카메라는 문자메시지 내용을 담아내지 않는다. 대신에 문자 내용과 메시지에 실린 감정을 가늠할 수 있는 이들의 얼굴을 교차로 담아낸다. 이들은 다음 숏에서 바로 몸의 대화를 시작하려 한다. 사치코는 ‘나’에게 질척대지 않는 쿨한 관계를 요구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영화는 이들의 쿨한 관계에 불을 지피기 위해 시즈오를 등장시킨다.

사치코가 ‘나’와 육체적으로 연결됐다면, 시즈오와는 정신적으로 연결돼 있다. 시즈오는 이들의 사랑의 속삭임을 듣고 센스 있게 저녁이 돼서야 집에 돌아온다. 시즈오는 ‘나’의 소개로 사치코와 인사를 한다. 한자리에 모인 3명의 청춘은 가벼운 술자리를 가지며 대화를 이어나간다. 대화는 사치코와 시즈오가 주도하고 ‘나’는 대꾸만 한다. 이때 카메라는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는 ‘나’의 얼굴을 담는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이들의 분위기를 살핀다. 술자리가 끝나고 사치코는 집으로 가려 한다. 바닥에 누워 있던 시즈오는 그녀에게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한다. 사치코는 그를 귀여운 듯 바라보며 이를 수락한다. 이러한 둘의 모습을 ‘나’가 지켜본다. ‘나’의 입장에서 사치코에게 끼를 부린 시즈오가 못 미더울 텐데 그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는다. 이날, ‘나’는 사치코에게 시즈오의 검은색 티셔츠를 빌려준다. 사치코는 막 빌려 입어도 되냐고 묻는데 나는 신경 안 써도 된다고 답한다. 하지만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영화는 이 사소한 옷에서 이들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사치코는 시즈오의 티셔츠의 냄새를 맡는다.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은 시즈오가 사치코의 마음에 옷을 통해서 가시적으로 페이드인한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치코의 마음속엔 ‘나’가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서점 점장과의 관계를 마무리하고 나에게 집중하려는 중이었다. 이는 점장이 ‘나’에게 한 말에서 유추할 수 있다. 점장은 퇴근길에 ‘나’에게 사치코를 소중하게 대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대꾸도 하지 않는다.

사치코는 ‘나’에게 점장과 나눈 대화에 대해 묻는다.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그의 대답에 그녀는 낙심한 표정을 짓는다. 또한, 그는 그녀가 시즈오와 함께 캠핑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질투조차 하지 않는다. 목석 같은 반응을 보인 ‘나’는 집을 떠난다. 사치코는 덩그러니 식탁에 앉아 있다. 그녀를 담은 이 숏에 시즈오가 등장한다. 그는 팬티 한장만 걸친 채 커피를 내린다. 그의 모습은 마치 ‘나’를 닮아 있었다. 이는 체에 걸러진 커피 찌꺼기와 같은 감정의 표현이다. 영화는 사치코가 ‘나’에게 가진 미련의 감정을 시즈오에게 투사하여 시각화한다.

이러한 감정의 시각화는 캠핑에서 돌아온 사치코의 모습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캠핑을 마치고 돌아온 사치코는 시즈오의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다. 시즈오는 영화상에서 줄무늬 티셔츠를 가장 많이 입고 등장한다. 그 옷은 시즈오를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오브제다. 영화는 옷을 통해서 감정이 신체로 이염된 듯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사치코는 시즈오의 옷만 빌려 입는다. 반면에 ‘나’의 청색 셔츠는 오로지 그의 것이다. 옷은 이들의 정체성을 일면 대변한다. 시즈오의 옷을 입고 있는 사치코를 보면서 ‘나’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한다. ‘나’가 사치코에 대한 마음을 정리한 그 밤, 시즈오에게 한통의 전화가 온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형의 전화였다. 시즈오는 다음날 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떠나려고 한다. 3명의 청춘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하지만 전에 클럽에서 하나가 되어 놀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카메라는 이들을 한 프레임 안에 가둔다. 하지만 이들은 전과는 다른 입장과 감정에 놓여 있다. 사선으로 사치코, 시즈오, ‘나’가 화면에 위치한다. 사치코는 시즈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대화를 걸어보지만 시즈오는 퉁명스럽게 반응한다. 이때, 거울에 비쳐 등장했던 ‘나’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나’가 의자에 기대면서 그의 얼굴이 시즈오의 얼굴 뒤로 가려진다. 영화는 두 얼굴을 중첩시켜 마치 하나의 인물처럼 만든다. 시즈오가 사치코에게 비꼬듯 말을 던졌을 때, 카메라는 ‘나’의 정면을 담으며 중첩된 이들의 얼굴을 분리한다. 이 숏에서 ‘나’는 시즈오의 뒤통수를 쳐다본다. 째려본 것에 가까운 ‘나’의 시선에서 우리는 그가 사치코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잔존해 있음을 알 수 있다.

3명의 청춘이 함께하는 마지막 밤이 종료되고 아침이 밝았다. 시즈오는 떠날 채비를 한다. 그의 후줄근한 티셔츠가 안돼 보였는지 ‘나’는 자신의 청색 셔츠를 그에게 건넨다. 시즈오는 사치코에게 시각적으로 완전한 ‘나’의 모습을 한 셈이다. 시즈오가 떠나고 사치코는 ‘나’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사치코는 시즈오와 사귀기로 했다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대낮에 이들은 이별한다. 건널목에서 사치코는 ‘나’를 꼬집고 간다. 그녀의 터치는 ‘나’에게 이들의 첫 만남을 떠오르게 만든다. ‘나’는 떠나는 사치코를 바라보며 다시 숫자를 되뇐다. 얼마 세지 못하고 그는 그녀에게 달려간다. ‘나’는 사치코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말은 감정의 갈피를 잡는 역할을 한다.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는 말로 표현되는 사랑보다 두 사람간의 정제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따라서 영화는 무언가를 확정 짓는 ‘말’보다는 얼굴을 통해서 여지를 남기는 방식을 취한다. 애매한 그녀의 표정에서 피어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의 표정이다. 따라서 ‘나’의 용기에 그녀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얼굴을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그 얼굴이 이들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는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나’의 용기가 사랑이라기보다는 ‘늦은 후회’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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