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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 허문영,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1)
2002-05-10

제1장 장승업, 그리고 임권택

정성일은 자칭 임권택 팬클럽회장이며, 허문영은 그 팬클럽회장에게 <취화선> 촬영동행기를 청탁해 그걸 50페이지에 걸쳐 실은 잡지의 편집장이니 이 인터뷰에 내부자 거래의 혐의를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성일은 거의 스탭처럼 촬영현장을 오가면서 장면에 따라서 20, 30회 이상 봤고, 임권택 인터뷰집을 10여년전에 펴낼 정도로 임 감독의 영화세계를 누구못지 않게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임 감독의 인터뷰어라면 가장 적임자다. 허문영은 참관자의 입장을 자처하고 따라갔다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몇마디 끼어들게 된다. 두 사람은 내부자 거래의 혐의를 벗기 위해 사전 작전회의도 가졌다는 후문이다.

<취화선>을 누구못지 않게 애타게 고대했을 이 두 사람을 맞는 임권택 감독은 초등학교 은사가 옛 제자를 맞이하는 듯 함박꽃 환하게 핀 표정이었지만, 한편 이들이 쏟아낼 질문 공세를 떠올리는지 일말의 긴장감도 내비쳤다. 특히 두 사람이 이날 오전 8시부터 ‘작전회의’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나선 더욱. 하지만 98번째 또는 99번째 영화를 만든 이 거장은 시종 겸손하지만, 완강하게 <취화선>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했고, 새로운 미학의 여정을 출발하는 순례자의 설레는 가슴을 엿보게 했다. 편집자

제1장 장승업, 그리고 임권택

허문영 <취화선>은 어찌됐건 장승업이라는 한 예술가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장승업이라는 인물을 선택하게 된 얘기는 그때도 많이 말씀하셨고 중간에도 많이 말씀하셨는데, 촬영이 끝나고 나서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볼 때 장승업이란 인물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 달라진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임권택 들려오는 얘기로는 장승업 선생이 굉장히 농을 잘했다고 그래요. 굉장히 짙은 농을 거침없이 하고 사람을 그렇게 웃겼다고. 어디 기록에서 보니까 궁궐에서 도망쳐 나와서 자하문 밖 단골 주막에서 늙은 주모하고 술먹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걸로 봐서는 지금 우리 영화에서 담고자 하는 장승업, 즉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노력하는 장승업에 비하면 실제 장승업의 성품은 더 통 너르고, 그런 분 같애. 또 호암미술관에서 매화병풍 10폭짜리인가를 보는데 탁 와닿는, 압도하는 힘이 있어요. 그런 압도하는 힘, 그러면서도 질퍽한 농을 생활 속에서 거침없이 구사했던 부분이 더 충실하게 담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을 할 겨를이 없는 거야. 해야 할 게 너무 많았으니까. 알면서도 채워넣을 여유가 없었던 거야. 영화가 끝난 뒤에 내가 그 양반 안으로 진짜 얼마나 들어갔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온전히 들어갔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그런 생활에서 오는 호방함, 이런 것이 꼭 중요한 게 아니라면, 어쩌면 잘 들어갔다는 생각도 하고.

허문영 저희는 그림은 잘 모르지만, 장승업은 걸출한 화가이긴 했으나 한국화의 새 경지를 보여준 사람은 아니었다는 게 일종의 공식화된 평가입니다. 감독님은 결국 끊임없이 한국적인 영화미학을 탐색해오셨고, <취화선>에선 주인공을 예술가로 삼아 그걸 한 단계 더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하시려고 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장승업이라는 이 모델이 예술세계와 감독님이 가진 주제의식과 어울리기 힘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얼핏 보기엔 김홍도가 더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요.

임권택 여기에는 저도 할 얘기가 좀 있거든요. 내가 <개벽>이란 영화를 하면서 해월 최시영 선생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진장 노력했어요. 그 사람도 서민적이고 또 농군이고 무학이고…. 그러다 뒤로 가서는 2대 교조로서 어떤 또 카리스마도 있고, 그 엄청난 점조직을 아주 잘 관리했던, 그런 분 안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했어요. 그런데 설마 들어가겠지, 하다가 끝내 못 들어갔어요. 거기서부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냐 하면, 소재가 좋다고 해서 아무리 들어가도 어떤 한계를 느낀다는 거예요. 나는 김홍도도 영화로 담고 싶은 적이 있긴 했어요. 그런데 왜 장승업이냐 하면, 내가 그래도 가장 가깝게 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이거는 뭔 얘기냐 하면 삶의 행적이 같은 부분이 있다는 거예요. 고아라고 되어 있고, 어렸을 때부터 떠돌이살이, 담살이도 했다는데, 나는 뭐 물론 고아는 아니지만 어린 나이에 떠돌이 생활한 건 같아요. 그리고 장승업 선생이 술을 그렇게 좋아했다는데, 나도 한때는 감독으로보다는 술꾼으로 훨씬 유명했으니까. 젊을 때 벌써 수전증 앓고 돌아다녔으니까. 고개까지 떨렸으니까, 나는. 대폿잔을 두손으로 들어도 너무 흔들려서 아예 잔을 놓고 마실 정도로. 생각건대, 장승업 선생이 술 마실 때, 즐겁자고만 술 마셨겠냐는 거예요.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해요. 내가 술꾼으로 그렇게 세월을 보낼 때도 내 삶에 대한 희망이나 장래를 위해서 무엇을 노력한들, 무슨 이룸이 있겠는가 하는 절망감, 물론 가족사적인 그 무슨 멍에 같은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해서 폭주를 하다보니까, 그게 늘어서 양도 커지고 그랬는데 장승업 선생도 아마 꼭 뭐 기분 좋자고 늘 마셨을 리는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적으로 어떤 갈등이나 고뇌나 아니면 고통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마셨을 거라는 생각을 한단 말예요. 이런 건 다른 점이죠. 장승업 선생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도 좋은 그림을 그린대요. 나도 한번은 코미디를 찍다가 안양촬영소에서 조명기사와 밤새도록 마셨어요. 그런데 스탭들이 서울에 갔다가 아침에 해뜰 때 돌아온 거요. (일동 웃음) 조명기사는 현장에 못 나오고 나는 어떻게 현장에 와서 횡설수설 찍고난 뒤로, 죽어도 현장에서는 안 마시기로 작정을 해서 지금까지 잘 지키고 있죠. 또 뭐 예쁜 여자 옆에 놓고 그림 그렸다는데, 난들 예쁜 여자 안 좋아할 것이며, 나는 미추 관계없이 여자라면 다 좋아하고. (일동 웃음) 또 하나는 이 분이 사십 넘어서 결혼해가지고 하룻밤 자고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다시는 그 여자에게로 안 가고. 나는 아직도 애 둘 낳고 지금까지 안 헤어지고 살지만(일동 웃음), 그런데 그것도 이해가 가는 거예요. 아, 이 여자하고는 정말 못살겠다 하면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고.

정성일 저는 개인적으로, 지난 10년 동안의 감독님 영화 중에서 가장 예술적 야심을 갖고 찍었던 작품은 <춘향뎐>과 감독님 스스로 야심에 비해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하신 <개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취화선>을 제외하고 예술가들을 다뤘던 영화는 <서편제> 한편이었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취화선>이라는 영화가 <서편제>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또 <서편제>는 감독님 영화 중에서 예술적으로도 가장 성공적인 영화의 한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취화선>을 보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감독님 영화 중에서 가장 야심적이었던 <개벽>과 가장 완성도를 얻었던 <서편제>라는 두편의 영화를 갖고 결국 다시 한번 해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즉 그 두 영화가 <취화선>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권택 나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보였다면 뭔가 그쪽에서 미진했던 어떤 것들이, 내 안에 축적된 것이 이번 영화를 통해서 조금 드러났다고나 설명해야 할지. 그러나 거기서 둘을 합쳐보고자 했던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 없고 지금 여기서 이렇게 처음 들으면서, 내가 혹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정성일 감독님의 이제까지의 영화 중에서 <춘향뎐>은 <취화선>의 대사를 빌리자면 영판 다른 영화가 나온 셈이었습니다. 감독님 영화의 새로운 경지였던 셈인데, <춘향뎐> 하나로 산맥을 뛰어넘은 다음에 거꾸로 과거의 영화들을 다시 한번 끌어들인다는 생각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만들었던 것에서 한번 더 거듭나보자는 맥락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취화선>을 찍고 난 다음에 다시 <춘향뎐>을 돌아보았더니 그 영화가 감독님에게 어떤 영화였습니까.

임권택 글쎄, 내가 돌아볼 시간도 없었고…. (웃음) 생각해봐야 될 일인데,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은 있어요. 한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개성, 거기서 주는 어떤 아름다움, 정서, 이런 것을 담아내려 했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거예요. 그러나 거기는 소설을 따라가면서 이뤄진 세계이고, <취화선>은 물론 허구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도 주변에 살아 있을 것 같은 그 사람의 삶을 정면으로 쫓아가면서 드러내고자 한 그런 세계이기 때문에, <춘향뎐>에 비해서는 월등히 설득력 강한 한국인의 삶이 여기 박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정성일 사실 제가 <취화선>을 보며 <춘향뎐>하고 한쌍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두편 다 조선시대의 멋과 흥을 다루는데, <춘향뎐>이라는 영화가 조선시대의 멋과 흥의 형식을 다룬 영화라면, <취화선>은 조선시대의 멋과 흥의 내용을 다뤘다는 점에서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임권택 그렇게 볼 수도 있겠어요.

정성일 그러니까 어쩌면 <춘향뎐>에 이어서 <취화선>을 칸에 불렀을 때 서방 세계의 견해는 그 두편의 영화가 어떤 점에서는 서로 보완의 의미가 있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얼핏 생각해보았습니다.

임권택 한국인의 정서를 그런 식으로 뭐, 이쪽은 내실을 기했고, 저쪽은 형식을 다뤘다고 한다면 그 말도 맞는 거요. 그러나 감독이라는 자의 관심은 그것과는 좀 다르죠. 그런 것을 나는 지엽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저쪽은 소리를 축으로, 그 소리가 갖는 감흥을 영상과 어떻게 조화롭게 합일을 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그림이 갖는 어떤 것을 영상으로 드러내면서 총체적으로 어떤 한폭의 대형 영상그림을 보여주는, 목적이 이렇게 서로 다르다고.

정성일 <취화선>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장승업이고, 장승업은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고, 그 사람의 그림은, 하지만 김병문 선생도 지적하다시피 조선화의 대맥인 진경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영화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서편제>라는 영화에서는 마지막에 서로 소리하고 헤어질 때 주막 주인의 입을 통해서 “한을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면서 소리의 정서, 뿌리는 한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취화선>을 통해서는 조선화의 뿌리요, 정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셨으며, 무엇 때문에 장승업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롭게 거듭나고 싶어하는, 예술적 자기 존재를 찾으려 노력하는 인물로 전제하고 영화를 시작하셨는지.

임권택 참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데, 장승업이라는 프로는 아마 정선 같은 분들이 중국화와 확 다른, 실경을 중심으로 한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해볼 수 없겠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을 것이라는 거요. 그러나 진경에 대해서 세인들의 관심이 멀어졌고, 그래서 아마 뭔가 모색하면서도 그런 세계를 해내지는 못했던 작가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 화가를 주목할 필요가 뭐 있냐는 문제가 걸리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묻고 있는 대답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단 말이에요. 무엇을 이루고자 한 삶을 부단히 살았지만 이룬 것은 없는 화가, 정선처럼 우리가 눈으로 봐서 얼른 드러나는 이룸은, 차별화된 그림의 세계는 해내지 못한 화가, 거듭나려는 의지를 갖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화가를 그리려 한다는 거요. 이 치열한 생이라는 게 그림이 지향하는 세계만큼이나 아름다운 세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그림의 아름다운 세계와 삶의 아름다운 세계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큰 영상의 어떤 동양화일지, 동양화가 주는 어떤 영상의 그림일지, 이런 데 목적이 있었다는 거죠. ▶ 정성일 · 허문영,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1)

▶ 정성일 · 허문영, 임권택 감독을 만나다 (2)

▶ 제2장 <취화선>, 그 열두폭 병풍 속으로

▶ 제3장 <취화선>, 임권택 영화 미학의 새로운 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