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인적인 취향 이야기를 좀 하자면 내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영화들은 태반이 멜로드라마다. 어렸을 적에 흑백 텔레비전으로 본 ‘주말의 명화’는 말할 것도 없고, 영화에 영혼이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했던 <사운드 오브 뮤직>, 윤심덕의 애사를 통해 자의식과 시대 사이의 갭에 관한 두려움을 예감케 했던 <사의 찬미>, 사랑의 망설임과 두려움에 관한 프랑스영화 <겨울의 심장>(국내 개봉 제목은 잊어버렸다) 같은 것이 쉽게 떠오르는 예다. 이런 영화들은 마음의 민감한 현, 일명 심금을 지잉 울려준 다음 길게는 일주일쯤 넋이 나가게 만들곤 했다.
돌이켜보건대 멜로드라마는 나에게 여성으로서의 성장과 사회화 과정에서 성적 정체성을 구성하고 역할 모델을 발견하는 교과서 구실을 담당했던 것 같다. 남성들이 가족과 학교, 군대와 직장생활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일관되게 사회화 과정을 겪는 것과 달리, 여성들은 다소 사적이고 개별적인 방식으로 이 과정을 통과한다. 그런 의미에서 멜로드라마는 여성의 개인적인 판타지와 사회적인 역할 교육이 마주치는 중요한 접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멜로드라마 연구와 여성 연구 사이에 종종 긴밀한 상관성이 발견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비단 연애나 결혼, 가족과 같은 여성의 사적인 경험과 공간을 다룰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이슈를 흡수하고 반영하며 재조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비단 유럽학계의 미시사 연구와 일상의 정치학을 경유하지 않더라도, 급격한 사회 변동 시기인 1950∼60년대에 나온 한국의 멜로드라마를 보더라도 뚜렷한 현상으로 관찰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감독 유하)는 우선 마음의 현을 울리는 힘을 갖춘 멜로드라마다. 아울러 현대 한국사회의 결혼 제도에 대한 성찰과 함께, 제도의 이면에 존재하는 풍속도와 심성을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되어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멜로드라마의 계보에 올라설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유하라는 감독의 재탄생을 알린다는 점에서도 반갑다. 영화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한 과도한 강박관념 없이 부드럽게 관객을 흡수하고 설득하는 부담없는 화법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오히려 보기 드문 태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평이하면서도 의미있는 말장난, 대사와 편집을 활용한 유머 등 상업영화의 문법 안에서 관객과의 소통 가능성을 확장하려는 노력도 간과하기 어려운 미덕이다. 십여년 동안 줄기차게 섹시스타로서의 붕뜬 이미지를 고정시켜온 엄정화와 스크린 신인인 감우성의 연기 톤을 비교적 조화롭게 조율한 것도 돋보인다.
결혼의 고고학: 스쳐가는 통과의례를 주목하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오프닝의 결혼식 장면을 포함해서 도합 세번의 결혼식이 등장하고 대사 속에서 또 다른 결혼식이 한번 더 언급된다. TV나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멜로드라마는 짝 찾기에 나선 선남선녀가 마침내 결혼이라는 ‘해피엔딩’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을 내거나, 아니면 몇 세대의 결혼이 이미 얽히고 설킨 가족 내부의 일상을 곰살맞게 소묘하는 가족드라마로 양분되어 있다. 반면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바로 그 경계선 언저리에 관한 이야기이고, 더욱이 결혼식의 정면이 아니라 이면에 관한 영화다.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에서 몇컷의 스쳐가는 장면으로 넘기고 마는 통과의례를 주목하면서, 그 화려하고 양식화된 의례를 감싸고 있는 베일을 홀랑 벗겨보이는 발칙함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네번의 결혼식은 기존의 멜로드라마가 부여해온 낭만주의나 신성함과는 거리가 멀다. 대신에 제도로서의 결혼이 갖는 절차와 목적, 양식화된 의례의 획일성 같은 것들을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게 우스꽝스러운지, 이 영화가 취하고 있는 이른바 리얼리즘적인 톤이 뜻밖에 의뭉스럽고 냉소적인 효과를 낸다.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가족 제도의 역할과 경험들은 19세기에 들어서서야 고안되고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현행 가족 제도는 거대 기업들조차도 스스로를 ‘가족’이라는 이미지에 갖다붙일 만큼 부르주아 경제체제의 핵심 장치로 여전히 기능하고 있다. 이 때문에 결혼이란 순전히 개인적인 선택처럼 보이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는 가족 단위의 치밀한 지략과 계획이 동원되는 일생 일대의 대역사가 되는가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프티 부르주아 계층에 속하는 여성주인공 연희(엄정화)를 통해 결혼의 이같은 정략적 성격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프티 부르주아에게 결혼은 교육과 더불어 신분 상승의 결정적 요소 중의 하나인데, 연희는 미모와 안주인으로서의 자질을 지참금 삼아 의사를 줄줄이 배출한 부르주아 가문에 입성한다. 그 대가로 직장을 포기하고 결혼을 생의 유일한 지평선으로 선택하는 계약을 마무리한다. 앞치마의 페티시즘이 보여주듯이, 그녀는 애교와 음식 솜씨를 통해 부르주아 안주인이라는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낼 것이고 출산과 육아, 자식에 대한 투자로 이어지는 부르주아 가족 재생산의 순환고리를 완수할 것이다.
연희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이같은 결혼의 실상을 낭만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모든 결혼은 사랑으로 맺어졌다는 환상, 혹은 그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주입하는 멜로드라마의 여성주인공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대신 그녀는 결혼이나 가족이라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모순적인 동기와 움직임, 감정들에 노출된 가공할 만한 비밀의 장소인지를 천연덕스럽게 보여준다. 인터넷 아이디(ID)가 프로이트식 이드(id)로 달려간다는 누군가의 지적처럼 오늘날 이런 분열증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집단적으로 표출되는데,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결혼 제도와 현대적인 섹슈얼리티라는 이슈가 주류 상업영화 안에서 본격적으로 폭발하는 출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생활의 역사: 섹슈얼리티는 고삐 풀려 돌아다니고 있다
이 영화의 갈등축은 크게 두 가지이다. 결혼을 통해서 경제적인 안정과 신분 상승, 정서적이고 성적인 친밀감이라는 서로 다른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고 싶어하는 여자의 욕망이 그 하나다. 다른 하나는 자존심과 자의식, 자유로운 생활 태도를 갈망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갖지 못한 남자의 태도이다. 두 사람은 한 가지 면에서는 서로 통하면서도, 다른 한 가지가 서로 어긋난다. 결혼해서 살까, 헤어지고 말까? 두 사람은 갈등의 정체와 그것의 잠재적 결과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다.
남자가 그것을 입으로 줄줄이 꿰면서 경험과 통찰력을 과시하는 동안, 연희는 자신의 두 가지 욕구를 두개의 결혼생활로 나누어 충족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현실화시킨다. 하나는 공식적인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비공식적인 결혼, 이를테면 동거이다. 화자가 준형(감우성)이고 연희는 준형의 시선 없이는 화면에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영화 전체가 일견 남자 이야기로 보이지만, 드라마의 강력한 중심이 여자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영화는 여자의 감정적인 욕망선, 그러니까 비공식적인 결혼생활쪽을 충실히 추적한다. 그녀의 공식적인 결혼생활은 준형의 추측과 몇번의 간단한 전화통화를 통해 간단히 제시될 뿐이다.
두 가지 결혼생활의 대립은 영화 속에 나오는 두 종류의 사진들을 통해서 명료하게 대비된다. 공식적인 결혼을 기록하는 사진들은 하나같이 지루하게 양식화되어 있는 반면, 연희의 사진은 내밀하고 사적인 순간을 꼼꼼히 구성하는 추억의 연대기를 이루고 있다. 사진이라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을 이미지의 파노라마로 재구축하려는 노력이라면, 연희의 사진은 그녀가 결혼을 통해 진정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사진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앞치마가 진심으로 복무하는 것 역시 비공식적인 결혼생활쪽이다.
현실생활에서는 이미 가족 제도의 통합성에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갈등의 요소들이 급팽창한 지 오래다. 평등주의와 개인주의의 진전, 독신주의나 이혼의 증가, 반항적인 사춘기 소년소녀들, 게다가 보헤미안적인 예술가와 댄디즘을 숭앙하는 지식인 등 다양한 층위에서 가족 제도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결혼이 섹슈얼리티를 수용하기에 유일하고 최적의 방식이라는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 남녀 모두 결혼 연령이 30살 전후로까지 늦춰지면서 섹스의 대기상태가 역사상 가장 길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 제도 바깥의 육체와 성에 대한 억압은 고작해야(?) “당신의 노년이 쓸쓸할 것”이라는 엄포 정도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가두어 두기를 원했던 섹슈얼리티가 고삐 풀려 돌아다니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성과 사랑에 관한 비밀스럽고 경건한 상징 장소였던 신혼 부부의 침대조차 그 권위를 잃어버린다. 연희가 아직 신방도 차려지지 않은 신혼 침대에 준형을 끌고 들어간 것이다. 비록 불발되긴 했지만 여성 관객조차도 “어머나!”라는 비명을 지를 만큼 충분히 신성모독적이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연희는 드라마 안에서 처벌받지 않은 채(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들키지 않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준형의 집 앞에 나타난다. 준형은 그것들에 담긴 연희의 집요한 의지를 뒤늦게 절실히 깨닫는다. 그 어처구니없는 의지와 뒤늦은 깨달음의 의미는 관객에게도 전염되고 두 사람의 멜로가 지니는 이같은 설득력은 결혼 제도의 위기와 모순, 현대인의 분열증에 대한 설득력으로 이어진다.
대중문화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진보 진영 역시 가족의 신화에 공공연하게 도전하기를 두려워하며 그들의 사상 안에 가족이라는 뇌관을 차라리 제거해버리고 있다는 점에서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발칙함이 특별해 보인다. 이 영화는 또한 “대한민국의 모든 가정이 ‘러브 하우스’가 될 때까지” 뛰겠다는 TV 프로그램이나, 해체된 가족의 재봉합을 우회적으로 설득하는 영화 <집으로…>와는 영 다른 곳에 서 있다. 그 지점은 차갑지만 현실적이다. 연희가 드러내는 특수한 태도는 그것을 이기심이나 뻔뻔함 혹은 병리적 증세 등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이 이 시대 사람들의 은밀한 내면 풍경이다. 이 때문에 그녀의 분열증은 모종의 감동을 주며, 역사적인 중요성을 안고 있다. 비바! 멜로드라마!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