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4월28일 아라이 에이치 공연
2002-05-08

`민족적`과 `국제적`

연강홀은 두산에서 지은 공연장이다. 한국 수준에 맞춘 전아미(典雅美)가 느껴진달까. 회장은 나와 빵잽이 동기동창일 것이다. 아마 1976년쯤? 재벌 2세들끼리 도박을 하다 박정희한테 걸려 들어온 그를 내가 ‘운동권 출신’ 감방장으로 맞았고 눈치밥깨나 먹이다가 어느 한밤중, 이를 잡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운데 놀라 ‘6·25를 겪은 어른’은 좌우를 막론하고 일단 존경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연강홀은, ‘노찾사’ 후배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도 아름답다. 대략 15년 전, ‘노찾사’는 최초의 ‘공개’ 혹은 ‘공개화’ 공연을 이곳에서 했고 첫곡 <그루터기>가 무대조명과 더불어 시작했을 때 나는 눈물이 핑돌았다. <그루터기>를 만든 한동헌은 현재, 미국 유학 경제학과 학벌을 내팽개치고 ‘노찾사’를 재건하느라 바쁜데, 그와 ‘노찾사’ 멤버도 객석에 보인다.

아라이 에이치는 일본뿐 아니라 세계 대중음악계에 이름이 꽤 알려진 재일동포 가수다. 한국명 박영일. 95년 일본 음반대상을 받았고 그 다음해 ‘꿈의 무대’인 카네기홀에 섰다. 고국의 무대에서 그는 다소 흥분했고 무대매너가 너무 ‘소탈해서 서툴러’ 보였지만 노래는 절규와 서정을 적절히 배합하다가 급기야 그 둘을, 마치 충격과 감동을 합하듯 동일시하는 대목에서 블루스 로커(blues rocker)의 위용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근데, 노래는 아니고, 뭐가 이렇게, 좀, 찜찜하지?

<아리랑 블루스 in 서울 ’02-아버지 땅에서 부르는 자유와 생명의 노래>라는, 참으로 긴 제목의 이 콘서트 팸플릿 겉장을, 흡사 혈서투의 아라이 에이치 붓글씨가 시커멓게 도배했다…. (중략) 혼신을 다해 외치겠습니다. 느낌표, 그리고 손가락 지문 도장. 나는 그것에서 ‘일본혼’을 느꼈다. 그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당연하다. 그는 ‘한국’과 ‘일본’을 음악적으로 종합, ‘국제적’ 가수로 발돋음했다.

우리는 그를 ‘재일동포’ 가수로(만) ‘환대하면서 왜소화’한 것 아닐까? 그 ‘왜소화’가 그의 ‘일본혼’을 동전의 양면으로 드러낸 것?…. 민족주의는 역시 위험하다. 이어진 <청하의 길> 연작은 ‘그의’ 민족주의 작품. 나는 오랜 습관대로 무대 뒤로 가서 가수 정태춘과 술을 할끔거리며 등 너머로 들었다. 뭐, CD로 들었으니까…. 김정환/ 시인·소설가 maydapoe@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