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도서
2만개 중의 하나 <바람을 본 소년>
2002-05-08

anivision

당연한 이야기지만 필자는 일반인들보다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는 편이다. 어릴 때야 뭐, 밥먹던 걸 잊어버리고 텔레비전에서 하는 만화영화를 보다가 야단맞은 일이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일반 가정의 보급시기보다는 좀 늦었던 1990년에 비디오데크를 들여놓은 이후부턴 비디오 대여점과 해적판 비디오를 통해 거의 닥치는 대로 애니메이션을 보았다(요즘은 고속전용선과 CD-R만 있으면 몇 백원짜리 공 CD에 수십편씩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넣을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서는 상당한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영화장르는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취향이지만 애니메이션을 볼 때는 고등학교 시절 학업으로 인해 애니메이션을 거의 보지 못한 반발력 때문인지 웬만큼 그림이나 스토리가 되어주면 웬만한 것은 불문에 부치고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서 보았다. 원작인 만화책이 긴 편이라 해적판조차도 제대로 전권이 나오지 않은 <란마1/2>이라는 작품의 TV애니메이션 전 시리즈(120분짜리 비디오 41개 총 161화)를 구해 8일 만에 다 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이야 그렇게 보진 못하지만 짬이 날 때마다 보는 편인지라 대략 하루에 2∼3편 정도 본 것으로 하여 이때까지 본 애니메이션 수를 계산해보니 2만편 정도 된다.

이 정도의 애니메이션을 보다보니 디지털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준 현란한 영상이나 좋아하는 감독이나 작가의 신작, 뇌와 감성을 자극해대는 몇몇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외하고는 순수하게 작품에 몰입해서 보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부작용이 생겼다. 발표시기보다는 조금 늦게 보게 된 <바람을 본 소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고질라> 시리즈로 유명한 오오모리 이쓰키가 총감독을 맡고 전쟁을 테마로 한 소설을 많이 써낸 C.W. 니콜의 원작에 체코 필하모니 실내 관현악단이 연주했다는 음악, 제24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수상 등의 사전 스펙(?)에 호감이 생겨 손을 대긴 하였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는 동안 이전에 보았던 작품의 이미지들이 중첩되면서 마치 패러디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오래 전 멸망한 ‘바람의 민족’의 힘을 이어받은 소년 ‘아몬’은 우수한 과학자인 아버지의 새로운 에너지 연구에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탐낸 독재자 ‘브래릭’에 의해 부모님이 피살되자 ‘아몬’은 금독수리의 도움을 받아 ‘빛의 놀이’라 불리는 힘으로 탈출한다. ‘바람의 민족’의 근원지인 ‘심장의 섬’에서 곰의 왕 ‘우르스’에게 ‘바람의 민족’의 역사와 멸망되었던 사연을 들은 ‘아몬’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려고 표류하다가 한 바닷가 마을에 다달아 소녀 ‘마리아’에게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그 마을이 ‘브래릭’의 공격을 받아 마을 사람들이 전멸하자 ‘아몬’과 ‘마리아’는 레지스탕스에 들어가 ‘브래릭’ 타도에 나선다”라는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다양한 캐릭터, 세밀한 메커닉 설정이나 전투신 등의 장점은 어드벤처 판타지물로서의 미덕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여러 군데 보이는 소재나 배경이 예전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작품 이미지와 겹쳐 마치 예전에 ‘우주소년 원더키디’에 등장했던 여자주인공의 목걸이를 보았을 때와 같은 안 좋은 기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하여 만든 작품을 이것저것 빗대며 폄하시키는 것은 과히 좋은 일은 아니지만, 황금독수리를 보면 <태왕의 왕자 에스테반>이나 <카잔>이, 곰의 왕 ‘우르스’와 심장의 섬을 보면 <원령공주>가, 바닷가마을에서의 공동체생활은 <태양의 왕자 홀스의 모험>이, 그리고 ‘브래릭’의 병사들이 쓰는 병기나 군사들의 모습에서는 <라퓨타>나 <미래소년 코난>이 떠오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인 것 같다.

완전한 오리지널리티를 가진 창조적인 작품을 요구하는 것이 수많은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에서는 무리한 주문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디서 베낀 듯한 드라마, 쇼 프로, 노래를 수시로 접하는 속에서 제발 애니메이션만이라도 보는 이의 뇌세포와 심장근육을 자극해주는 기폭제 역할을 다해주었음 하는 바람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