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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제스틱> `할리우드 10` 중 두명의 감독 이야기
2002-05-08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

같은 당내에서 벌어진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한 후보가 상대 후보의 장인이 좌익활동을 했다는 점을 마치 엄청난 문제인 양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일을 보면서 혀를 찼던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언제나 선거 때면 찾아오는 이런 색깔론의 망령에 진저리치는 그런 이들에게, 짐 캐리 주연의 <마제스틱>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영화이다. 무엇보다 자유의 수호자이며 인권의 보루라고 알려져 있는 미국이 한때는 우리보다 더 심한 색깔론의 광풍에 휩싸였던 시기가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이기보다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그려내고 있기는 하지만, 50년대 미국을 흔들어놓았던 매카시즘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큰 무리가 없는 것. 게다가 그런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 지금은 어느 정도(?)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사회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게 하는 점도 분명 의미가 있다. 각설하고, <마제스틱>의 짐 캐리가 여자를 쫓아 좌익 모임에 나간 것이 전부였던 것으로 그려졌지만, 최초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이른바 ‘할리우드 10’은 자신의 신념을 법에 의해 침해받은 매카시 광풍 시대의 가장 직접적인 희생자들이었다.

좌익그룹에 가입했느냐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1년여 동안 감옥에 가야 했고,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명예회복을 위해 제작사들과 오랜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끝내 원하던 명예회복을 달성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10명 중 8명이었던 시나리오 작가들은 모두 할리우드에서 작품활동을 하지 못해, 아예 유럽으로 이주하거나 할리우드 주위를 맴돌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 시나리오를 내기도 하고 TV 작가로 전향하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시나리오 작가들과는 달리 감독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나머지 2명의 행보는 너무나도 달랐다는 사실. 그중 한명인 반파시스트로 할리우드에서 정치적인 영화들을 만들었던 에드워드 드미트리의 경우, 감옥에서 풀려나자 미련없이 할리우드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 1949년 한해에만 두편의 영화를 만들며 왕성한 활동을 시작하는 듯했던 그는, 이혼으로 인해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하자 할리우드로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된다. 블랙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우고 다시 할리우드의 달콤한 생활로 돌아오기 위해 그가 한 일은, 반공 칼럼니스트의 도움을 받아 <무엇이 할리우드를 좌익으로 물들게 했다>라는 글을 1951년 5월 한 신문에 실은 것이었다.

그가 할리우드의 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부정한 것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을 블랙리스트에 넣었던 반미국적 활동에 대한 국회 조사위원회(HUAC)에 출석해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한 것은 물론, 26명의 좌익그룹 멤버들의 이름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더불어 일부 할리우드 10의 멤버들이 자신의 영화에 좌익의 시각을 넣게 강요했다고 밝히기까지 하면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 만다. 그런 에드워드 드미트리의 변절은 당시 제작사들과 소송을 진행중이던 다른 할리우드 10 멤버들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지만, 드미트리에게는 이후 할리우드에서 약 25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한편 또 다른 감독 출신 할리우드 10 멤버인 허버트 비버만은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외부로부터 제작비를 조달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자신의 사상을 담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그는, 같은 할리우드 10의 멤버였던 시나리오 작가 마이클 윌슨, 에이드리언 스콧 그리고 훗날 추가로 블랙리스트에 지정된 시나리오 작가 폴 제리코와 함께 <세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는 독립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뉴멕시코주의 아연광산에서 일하던 멕시코 출신의 미국인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파업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광산, 제련 관련 노동자조합에서 제작비를 일부 제공하고, 역시 블랙리스트에 오른 윌 기어라는 배우가 주연을 맡아 무료로 연기를 함으로써 촬영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블랙리스트들로 이루어진 제작진들이 만드는 영화였으니, 제작 자체에 대한 저항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처음 촬영지로 예정되어 있던 뉴멕시코의 한 도시에서는 주민들의 거센 항의로 촬영을 시작도 못하고 쫓겨날 정도였던 것.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만들어진 독립영화 <세상의 소금>은 54년 미국 전역의 극소수 극장에서 개봉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다는 극찬을 받고 프랑스와 체코의 영화제에서 수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공산주의적인 혁명을 선동한다는 비판이 여기저기서 나오면서, 1965년까지 미국 내에서 공식적으로 상영금지 조치를 당하고 만다. 그뒤 다른 작품활동을 하지 못한 허버트 비버만은 블랙리스트에서 해제된 이후 1969년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각색한 <노예들>(Slaves)이라는 한 작품만을 만들고 1971년 사망하는 불운한 운명을 맞이했다.

신념을 배반한 한 감독은 25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화려한 삶을 살아간 반면, 신념을 끝까지 지킨 다른 한명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신념을 지킨 이를 기억해주었다. 지난 세기 말 미 국립필름보관소가 영화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영구보전하게 되는 영화 100편에 허버트 비버만 감독의 <세상의 소금>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이철민/ 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사진설명

1. <마제스틱> 공식 홈페이지.

2. 얼마 전 출시된 <세상의 소금>의 DVD 표지.

3. <세상의 소금>를 만든 허버트 비버만 감독.

4. 아연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영화 <세상의 소금>의 한 장면.

할리우드 10인 홈페이지 http://www.spartacus.schoolnet.co.uk/USAhollywood10.htm

영화 <세상의 소금> 소개 페이지 http://www.organa.com/salt.html

<마제스틱> 공식 홈페이지 http://movies.warnerbros.com/themajes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