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의 새로운 인문 시리즈인 ‘채석장’ 시리즈의 첫권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알렉산더 클루게의 글을 묶은 <'자본'에 대한 노트>다. 에이젠슈테인은 <율리시스>가 블룸씨의 하루를 다루듯, 영화 <자본>에서 한 사람의 하루를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연상되는 사물들과 역사적 사건들을 이어 붙여 세계 전체를 그릴 참이었다. 이 대담한 생각은 구상만 남았다. 알렉산더 클루게의 글은 에이젠슈테인의 구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한다. 해고당한 프랑크푸르트 노동자의 일화부터 미국 자본의 투자 일화까지 연상의 조각들을 모은다.
<아카이브 취향>은 18세기 파리 형사사건 기록을 종일 읽는 역사가의 에세이다. 훼손된 종이 자료에다 구두점이 없고 알아보기 어렵게 쓴 글을 해석하는 답답한 시간. 하지만 경찰 문건 사이에 농담 가득한 개인적 편지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광장의 교통체증을 참지 못하고 진짜 칼을 빼든 인물이 사드 후작이었다는 뜻밖의 기록도 마주치니 손에서 놓지 못한다. 역사가는 만화경처럼 역동적인 아카이브에 지나치게 빠지지 않으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게 해줄 자료를 찾는다. 도무지 통제 안되는 활력 넘치는 파리가 현행범 그 자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렘 콜하스와 프레드릭 제임슨의 글을 묶은 <정크스페이스|미래 도시>. 렘 콜하스의 <정크스페이스>는 현대의 공간을 지배하는 원리로 바이러스처럼 어디든 침투해서 공간 자체를 바꾸어 도시 풍경을 똑같이 만들어버린다. 엘리베이터와 에어컨으로 연결되고, 상품 진열대가 튀어나오고, 언제든 리모델링될 수 있고 슬럼화될 수 있는 쇼핑몰적인 공간들. 항구성을 지향한 과거의 건축 이념은 사라진다. 정크스페이스가 먹어치운 세계의 끝은 종말인데, 그 묘사에서 묘한 활력과 매혹이 느껴진다. 이어지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미래 도시>는 현대사회에서 쇼핑이란 애초의 물질적 의미를 벗어나 행위 자체가 핵심이 되면서 심리적인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정크스페이스’의 해석을 돕는다.
상상의 채석장
“나는 <자본>을 영화화하려 한 에이젠슈테인의 원대한 계획을 상상의 채석장 같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자본'에 대한 노트>, 161쪽)
불행과 저항
“하지만 그 삶의 파편들, 다툼의 작은 조각들이 거기서 인간의 불행과 인간의 저항을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아카이브 취향>, 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