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공보물이 도착했다. 두툼한 분량이지만 다 읽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후보자명과 정당명을 유권자에게 빠르고 확실하게 주지시키겠다는 실용적 목적으로 제작된 이 선거공보들을 읽는 심사는 답답하다. ‘미래, 기회, 경제, 통합, 위기, 국민, 개혁, 혁명’ 등의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정당이 없고, 모든 문장에 느낌표가 남발된다. 그야말로 전력투구의 문장들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전면에 대문짝만하게 후보 얼굴 사진이 실리고, 뒷면에는 직업과 기족관계, 학력 및 경력, 재산 상황과 세금 납부 실적 및 전과기록이 적힌다. 이 작은 책자에 수십년의 인생사 세목을 구겨넣고, 그 와중에 정치적 비전까지 기입해야 하니 참으로 고단한 글쓰기였을 테다. 한데 바로 그 짤막한 문장 몇개, 후보의 시선 처리, 셔츠 소매 모양, 넥타이 색깔 따위가 그의 정치철학과 자아상을 반영하도록 면밀하게 계산된 ‘기호’라는 점이 선거공보의 묘미다. 모든 문장을 “충성” 운운하는 군사화된 수사로 가득 채우거나, 정체불명 단체들의 회장을 역임했다는 경력만 줄줄이 늘어놓은 후보들은 우리 구 주민을 위해 뭘 할 요량일까?거대 양당 중심이라 늘 ‘차린 것 없는 밥상’ 같던 선거는 올해 비례대표제 취지를 무색게 한 온갖 ‘위성정당’들의 등장으로 더욱 볼품없다. ‘비례연합정당’이라는, 정치‘공학’이라는 말조차 과분할 꼼수를 쓴 어느 당은 홍보전략으로 ‘○○당과 ××당의 이성애 결혼’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비유를 내세웠고, 결국 그 정당의 선거공보에 실린 문구는 “문재인 대통령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였다. “(박근혜) 대통령님 보고 싶습니다!”를 표어로 택한 그들의 숙적과 정확하게 같은 발상이다. 정치철학과 정책에 대한 서술 없이 그저 이승만, 박정희, 박근혜, 문재인, 노회찬의 얼굴을 크게 싣고 할 말 다했다는 듯한 이 책자들을 보노라면, 종이가 참 아깝다. “동성애, 이슬람, 차별금지법을 저지”하겠다는 어느 당은 선거공보를 빙자해 이런 혐오발언이 내 집에 배포되는 게 정당한지 숙고하게 만든다. 과연 이 선거는 “물리적 거리두기”가 권장되는 이 역병 난국에, 수많은 일회용 마스크와 장갑을 써가며 치를 만한가.
코로나19 정국을 의식한 듯, 많은 정당들이 ‘의사’, ‘의학박사’ 등의 이력을 가진 후보들을 내세웠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동네에 “랜드마크”를 만들고, “재개발”을 추진해, “초역세권”으로 만들겠다는 개발중심주의적이고 지역이기주의적인 공약들은 모두들 질세라 내세웠다. ‘과잉생산으로 인한 생태파괴’가 코로나19의 근본원인(최현숙, <코로나19, 미세먼지 ‘좋음’>)이라는데도, 이에 대해 관심 갖는 정당과 후보들은 드물다. 하지만 모든 공공기관이 운영을 멈추고 비정규직들이 가차 없이 해고되는 이 역병 정국에, 총선만은 결코 유보돼서는 안될 ‘거사’라면, 이유는 단 하나다. 이 선거가 정권뿐 아니라 개발과 성장의 신화를 맹목적으로 지지·승인해온 우리 자신을 심판할 가장 가까운 기회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