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미상>의 주인공 쿠르트(톰 실링)는 전후 독일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투영한 인물이다. 리히터는 사진을 캔버스에 그대로 모사한 뒤, 넓은 붓으로 다시 뭉개서 흐릿하게 만드는 기법인 ‘포토페인팅’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다큐멘터리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화>가 리히터의 2009년 추상 시리즈에 초점을 맞췄다면, 〈작가 미상>은 그가 1960년대에 제작한 포토페인팅에 주목한다. 그리고 나치 시대를 위시한 독일 격동기와 쿠르트의 개인사를 통해, 역사적 사건과 개인적 경험이 어떻게 그의 작품에 녹아들었는지 면밀히 살핀다.
영화는 포토페인팅의 기원을 말하기 위해 쿠르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두려움에 찬 쿠르트가 자기 손으로 눈앞을 가릴 때마다, 엘리자베스 이모(자스키아 로젠달)는 그에게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했다. 그가 손을 내린 자리엔 언제나 흐릿한 대상만이 존재했다. 쿠르트는 이러한 유년기의 경험을 화폭에 옮겨 형태가 흐릿해질 때까지 대상을 붓질한다. 과거의 기억이, 자신이 목도한 현실이 그러했던 것처럼 쿠르트의 포토페인팅은 엘리자베스가 그토록 강조한, “눈을 돌리지 않고” 현실을 직시한 결과물이다.
쿠르트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동하며 사회주의리얼리즘과 추상표현주의를 모두 경험했으나 결과적으로 양측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노선을 택한다. 이는 어떤 정치적, 미학적 이념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저항적 메시지다.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전작 <타인의 삶>에서 동독의 사회주의 그늘에서 벗어난 비밀 요원의 삶을 다룬 바 있다. 그는 시공간이 확장된 <작가 미상>에서 다시 한번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거부하는 인물을, 그리고 그의 예술을 다룬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작가 미상>의 갈등은 제반트(제바스티안 코흐)가 엘리자베스에게 ‘결함 있는 인간’이란 진단을 내린 데에서 시작된다. 엘리자베스는 강제로 피임 수술을 받고 결함이 있다는 낙인으로 인해 결국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처럼 제반트는 나치 친위대 장교이자 의사로서 누구보다도 충실히 임무를 수행했으나, 히틀러의 집권이 끝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독의 사회주의 진영에 자연스레 스며든다. 타의에 의해 나치 당원이 됐음에도 전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자살을 택한 쿠르트의 아버지와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제반트는 그런 쿠르트의 아버지를 비판하며 그의 나약함이 유전될 것을 우려해 엘리(파울라 베어)의 낙태 수술까지 감행하기에 이른다.
사회적 계급 차이, 부모와의 갈등 등 영화는 멜로 장르의 공식을 차용해 이들 사랑의 고비를 묘사한다. 실화와는 다르지만, 쿠르트의 이모 엘리자베스와 장인 제반트의 과거사를 엮어 두 가족간의 비극 또한 극대화한다. 이런 사정을 종합해보면 둘의 결합은 자칫 불가능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쿠르트와 엘리는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결혼해 함께 살아간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후 두 사람이 제반트로 대표되는 부모 세대의 삶을 답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치에 동조했던 과거를 덮고 평탄한 삶을 이어가는 기성세대에 강한 반감을 가진다. 엘리가 바란 대로, 두 사람은 결국 아버지와의 유대를 끊고 새롭게 삶을 시작한다. 엘리는 쿠르트에게 “당신 그림이 우리의 자식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당시 쿠르트가 포토페인팅이란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음을 상기하면, 그의 그림은 기성세대와 이별한 독일 신세대의 가능성을 현실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쿠르트에게 결정적인 트리거로 작용한 것은 페르텐 교수(올리퍼 마주크치)의 질문이다. 그는 예술만이 자유의 감각을 돌려줄 수 있다고 믿으며 학생들이 어떠한 외부 간섭도 없이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기 몸으로 부딪힌 세계, 피부로 스며든 실제 경험만이 진실이라 여기는 페르텐 교수의 굳은 신념, 더불어 “자네는 누구고, 무엇인가” 하는 페르텐 교수의 존재론적인 질문은 추상표현주의에 젖어 있던 쿠르트의 내면에 깊은 파장을 일으킨다.
‘현실’을 나타내는 새로운 표현 방식
이후 쿠르트는 “실재하고, 한결같으며, 일관된 현실”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 방식을 고민한다. 그에게는 현실만이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쿠르트는 당대 현실을 포착한 사진을 캔버스에 옮기기 시작한다. 실제로 리히터는 실세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진의 본질적 특성을 무척 신뢰했다. 그러나 그는 사진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회화가 이러한 사진의 특성을 흡수해 자기 영역을 보다 넓힐 수 있길 바랐다. 그렇기에 그는 사진을 모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여기에 두꺼운 붓질을 더해 형태를 모호하게 만드는 포토페인팅 기법을 고안한다. 1960년대 이후 미술계는 회화의 종말을 예견한 바 있으나 그는 보란듯이 새로운 양식의 회화를 등장시킨다. 이러한 포토페인팅의 중요성을 강조하듯, 카메라는 쿠르트의 붓 터치 그리고 대상을 흐릿하게 닦아내는 과정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사진이자 회화인 동시에 사진도 회화도 아닌 쿠르트의 포토페인팅에는, 동독과 서독의 예술 이데올로기를 지양하고 이들을 넘어서고자 한 그의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쿠르트는 가족이나 잡지 속 익명의 인물들 외에도 일렬로 선 간호사들과 나치 장교, 군항기 등과 같은 전쟁 관련의 요소들을 작품의 대상으로 선정한다. 이는 유년기에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쿠르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쿠르트가 두려움에 앞을 가린 손을 어렵게 치워냈듯이, 그는 작품 활동을 통해 공포와 트라우마로 점철된 자신의 과거를 정면으로 마주하고자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엘리자베스와 어린 쿠르트, 제반트, 그리고“환자 살인마”의 이미지가 겹쳐진 그림은 실제 존재하진 않는 작품이다. 그러나 쿠르트의 우연한 시도로 완성된 이 작품은, 리히터의 말을 빌리자면 “유령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 형상들”과 닮아 있다. 섬광처럼 떠올랐다 사라지는 기억과 같이, 제각각의 그리고 흐릿하게 묘사된 점이 특히 그렇다. 작품을 본 제반트는 혼비백산해서 달려나간다. 과거와 마주하고자 한 쿠르트의 시도는 시대 흐름에 교묘히 편승한 가해자에게도, 그리고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관객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쿠르트는 극중 인터뷰에서 작품에 정치적 의견을 담았냐는 질문에 자신은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다고 답한다. 그의 답변을 두고 한 기자는 “그 세대가 그렇듯 그도 할 말이 없다”라고 지적한다. 쿠르트는 숫자의 무작위한 나열과 로토 번호를 예로 들며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진의 매체적 특성을 활용해 관객이 어떠한 편견 없이 대상을 인지하도록 했음을 밝힌다.
“그도 할 말이 없다”라는 기자의 대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쿠르트의 의도를 명확히 짚은 것으로 보인다. 특정 이념을 따르지 않으며 대상과 관련된 정보도 모두 배제된, 그야말로 “작가 미상”인 작품들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한 쿠르트의 의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