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가 멈췄다. 코로나19 사태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국내외 영화제들이 일제히 연기되거나 취소됐다. 3월 26일 열릴 예정이던 인디다큐페스티발2020은 두달 뒤인 5월 28일에서 6월 3일까지 열린다. 4월 개막을 목표로 준비를 거의 마친 울주세계산악영화제는 무려 6개월 뒤인 10월 23일로 개막 날짜를 바꿨다. 울주세계산악영화제는 “영화제 준비가 거의 끝났지만 관객의 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태풍을 포함한 날씨, 다른 영화제 일정 등을 고려해 10월에 열기로 했다. 게스트 일정, 스탭 모집 등 세부적인 계획들을 다시 세워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4월 30일 개막 예정이던 전주국제영화제는 “게스트와 관객, 그리고 전주 시민 여러분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영화제 일정을 5월 28일부터 6월 6일까지로 조정”했다. 어린이의 달인 5월에 개최하려고 했던 서울구로국제어린이영화제 또한 “영화제의 특성상 어린이 관객과 게스트의 참석률이 높은 까닭에 어린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7월 2일로 미뤘다. 4월 22일 열릴 부산국제단편영화제는 8월 말 개막으로 변경됐다. 아직까지는 예정대로 6월 4일부터 8일까지 열릴 무주산골영화제 정도를 제외하면 상반기에 열릴 국내영화제 대부분이 연기됐다.
한국 밖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뉴욕의 봄을 알리는 트라이베카영화제는 개막일을 4월 15일로 연기했다. 트라이베카영화제는 “2001년 9·11 테러 사태를 계기로 공동체를 치유하기 위해 이 영화제를 만들었다. 우리는 함께함으로써 두려움과 불안감을 극복하기로 했다”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500명 이상이 참석하는 행사는 금지된다”는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발표를 근거로 영화제를 미루기로 했다. 대중들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동시에 창작자들을 지원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전했다.
매년 3월 바이어와 세일즈 관계자들의 눈치작전이 시작되는 홍콩필름마트는 처음으로 8월로 변경됐다. 4월 19일 열리는 홍콩 금상장영화제 또한 홍콩필름마트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홍콩 <타임 네트워크 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전계문 금상장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금상장은 예정대로 열리지만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시상자와 수상자만 시상식에 초대하고, 레드카펫 행사는 취소할 수 있다. 아직 확정된 내용은 아니며, 확진자 상황을 지켜보면서 어떻게 할지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홍콩은 확진자 숫자가 다른 국가들에 비해 많지 않지만 사스와 동남아시아발 아시아 금융위기를 연달아 겪은 만큼 코로나19 사태를 성숙하게 대응하는 분위기다.
주요 영화 마켓 중에서 가장 먼저 열리기로 유명한 홍콩필름마트는 8월로 연기됐다.
4월 10일 개막하기로 한 대만 금마장판타스틱영화제는 아예 취소됐다. 금마장영화제 조직위는 3월 18일 “처음에는 관객수가 절반 이하로 줄더라도 질병 예방 조치를 철저하게 해서 영화제를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관객과 영화인 그리고 영화제 직원들의 건강을 위해 취소하기로 했다. 잘 준비해서 내년에 열 계획이다. 올해 영화제에 초청한 감독, 프로듀서 등 영화인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라고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3월 18일 현재 확진자가 무려 3만명, 사망자가 2503명을 넘어선 이탈리아의 우디네극동영화제는 4월에서 6월 말(6월 26일부터 7월 4일)로 피했다. 우디네극동영화제를 공동으로 창립한 사브리나 바라체티 집행위원장과 토마스 베르타케 프로그래머는 “국민의 건강은 우리의 소중한 자산이다. 상황은 책임 있는 선택을 요구한다”고 날짜 변경을 공식 선언했다. 이탈리아 정부가 코로나19 확산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고, 아시아인들에 대한 일부 이탈리아인들의 혐오가 극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영화와 영화인들을 초청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 밖에도 이스탄불국제영화제, 말라가판타스틱영화제, 불가리아 소피아국제영화제 등 많은 영화제들이 연기됐다.
세계 곳곳에서 영화제들이 개막을 미루는 가운데 예정된 일정을 강행하는 영화제도 있다. 미국 휴스턴국제영화제는 원래 일정인 4월 17일부터 26일까지 열기로 했다. 휴스턴국제영화제는 “영화제 스탭들은 미국 정부가 제공하는 질병 관리 지침과 확진 상황을 매일 지켜보고 있고, 참가자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가능한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휴스턴시와 텍사스주의 공공보건부와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질병 예방 지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올해 영화제를 예정대로 진행할 자신이 있다”고 전했다.
칸국제영화제, 예정대로 열릴까?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가운데 제73회 칸국제영화제는 예정대로 개막할 수 있을까.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펜데믹(대유행)이 선언되자 전세계 영화인들의 이목은 단연 제73회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의 개막 여부에 쏠렸다. 칸국제영화제 조직위는 3월 19일(현지시각) 원래 일정인 5월 12일부터 23일까지 영화제를 열 수 없다고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새로운 개막 날짜를 확정하지 않고, 6월 말에서 7월초 사이라고 밝혔다. 4월 16일 열릴 예정이던 경쟁부문을 포함한 초청작을 발표할 공식 기자회견 또한 연기됐다. 영화제를 강행하겠다는 피에르 레스퀴르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입장이 나온 뒤 일주일 만에 뒤집힌 것이다. 지난 3월 11일 피에르 레스퀴르 집행위원장은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 사태가 악화된다면 올해 영화제를 취소한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 사태가 3월 말 정점을 찍은 뒤 4월에는 다소 나아질 것으로 낙관한다. 아직까지는 영화제가 열릴 거라 낙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3월 18일 현재 기준으로 코로나19 프랑스 확진자가 무려 7730명, 사망자가 175명으로 확산되고 있고, 그러면서 프랑스 정부가 1천명 이상 모이는 행사를 금지하면서 칸의 의지대로 영화제가 열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칸영화제 조직위원회는 “프랑스를 포함한 국제 보건 상황이 개선되는대로 프랑스 정부, 칸 시청, 영화제 파트너들과 함께 상의해 새로운 개막 날짜를 정할 것”이라며 “세계 보건 위기의 시기에 코로나19 사망자들, 질병과 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전했다.
칸영화제가 잠정적으로 변경된 날짜인 여름에 열리든, 그렇지 않든 영화제를 포함한 전세계 영화산업은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10명 이상 모임 자제 권고”에 따라 미국 1, 2위 멀티플렉스 체인인 AMC와 리갈시네마가 3월 17일(현지시각)부터 무기한 영업 중단에 들어갔다. 또 랜드마크와 하킨스시어터 등 5개 멀티플렉스 체인 또한 영화관 문을 걸어 잠궜다. 이처럼 미국을 포함한 전세계 극장들이 문을 닫거나 관객이 극장을 찾는 것을 조심스러워하는 현재의 산업 분위기에서 칸영화제 기간에 열리는 전세계 최대 규모의 칸 필름마켓은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 영화 수입사 대표는 “칸영화제가 예정대로 열리더라도 필름마켓에서 평소처럼 출혈을 감수하며 영화를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극장에 사람이 없어 손익분기점을 넘기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산업 상황에서 사놓고 개봉시키지 못한 영화들도 수두룩하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전세계 수입사들도 비슷한 상황”이라고 걱정했다.
영화제 연기 및 취소 상황이 장기화될수록 피해는 고스란히 창작자들에게 돌아간다. 극장과 IPTV를 포함한 2차 부가판권 시장 그리고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 등 선택지가 여럿 있는 상업영화와 달리 규모가 작은 독립·예술영화들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최초의 통로가 영화제이기 때문이다. 김태형 전 한국영화아카데미 교학처장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제작 지원작을 포함한 제작비 규모가 작은 영화들 입장에서는, 영화제가 관객을 가장 먼저 만나고 이를 통해 극장으로 나가는 관문이나 마찬가지인데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영화제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되면 이 통로가 막히게 돼 타격이 매우 클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코로나19 사태는 영화산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코로나19가 관객의 발길을 막으면서 영화 관람 방식이 극장에서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으로 옮겨가게 되고, 그렇게 되면 메인 투자·배급사의 영화 투자가 점점 축소되며, 지금과 같은 규모의 한국영화 또한 줄어들면서 도산하는 투자·배급사나 제작사가 속출할 가능성도 있다. 한 대기업 투자·배급사 임원은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한 건 어떤 프레임이 변화해 산업의 체질이 바뀌는 게 아니라 외부의 강력한 요인(코로나19)이 산업을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강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으로, 전세계 영화산업 구성원 모두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