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도로에서 지진의 흔적을 봤다. 금이 쩍 가고 주변이 울퉁불퉁 일그러진 모습. 아스팔트며 시멘트, 금속 같은 건 지구 껍데기의 일렁임 한번에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부림지구 벙커X>는 대지진이 일어나 완전히 부서져버린 부림지구라는 동네와 벙커를 떠나지 않는 이재민 이야기다.
숲속 철근 덩어리로 감춰진 벙커 속에는 지진 생존자 10명이 산다. 짐작건대 행정 당국에선 부림지구 지진 생존자들이 오염된 상태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이들은 몸에 생체칩을 이식해서 당국의 감시를 받거나, 아니면 축축하고 답답한 벙커에 숨어있다 가끔 거리로 나가 생필품을 구해 사는 수밖에 없다. 벙커에는 배우가 되고 싶다며 느닷없이 연기를 펼치곤 하는 청소년 혜나도 있고, 프랑스산 홍차와 쿠키를 그리워하는 우아한 노인 부부도 있고, 생활력이 강해 라면을 구해오고 자가전력기를 만드는 대장도 있다. 이들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벙커의 일상을 함께하는 한편, 지진이 일어나기 전 과거의 평화로운 이미지들이 떠돈다. 친구와 함께 먹던 노란 카레, 철가루를 먹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믿는 부림의 전통에 따라 나눠먹은 철가루 모양의 과자, 맥주와 땅콩. 이 모든 것들은 지진과 함께 사라지고 “부러지고 꺾인 것들 천지인 검고 그을린 세상”이 있을 뿐이다.
재난이라는 비극에는 종종 쓴웃음이 곁들여지니, 주인공 유진은 지진 때문에 흙구덩이에 빠져 꼼짝 못하다가 흙덩어리와 함께 구조되어 ‘인간 화분’ 소리를 듣는다. 밤이면 헬리콥터가 벙커로 내려보내는 종이 광고엔 안전 이주를 보장한다며 “현찰 우대, 귀금속 우대, 금니 우대”라고 쓰여 있다. 유진은 차마 벙커를 떠나지 못한다. 검은 성채 같고 짐승 같던 제철단지와 그곳에서 일하던 아버지, 쇳내 진동하는 파쇠 더미에서 뛰어놀던 유년 시절의 추억, 어른이 되어 그리움에 다시 찾은 고향 부림. 오래 전, 댐 건설로 수몰된 지역의 주민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정체성과도 같던 장소를 잃은 상실감의 무게.
끝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끝이 왔으면 싶었고 먼지처럼 철가루처럼 녹아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