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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영화 이야기
2001-03-22

깊은 밤, 파리의 뒷골목 한밤의 러브레터

◆프렌치 누아르의 ‘참을 수 없는’ 매력

범죄영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애정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우선은 40년대 중반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새로운 미국의 범죄영화에 대해

필름누아르 즉 ‘암흑영화’라는 명칭을 부여했으며 열광적인 찬사를 보낸 곳이 프랑스라는 사실은 이제는 상식에 속하는 것일 게다. 거기다가

프랑스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쉽게 모방하기 힘든 아주 독특한 범죄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 이미 30년대에 장 르누아르의

<교차로의 밤> <암캐> 같은 영화가 그 자체로 필름누아르의 원형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인상적인 시각적 스타일, 도덕적인 모호성을 실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르셀 카르네의 <새벽>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의 경우에도 그 숙명성의 정조에서 미국의 필름누아르를 예견케 하는 점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 미국의 필름누아르를 이야기할 때 스타일에 있어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많이 지적하지만 영향관계를 따질 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이러한 프랑스 범죄영화들이 보여주는 실존주의적 숙명성이라는 테마라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 필름누아르에

이미 ‘프랑스적인’ 부분이 어느 정도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자크 베케르,유행을 이해한 천재

2차대전 이후 등장한 많은 프랑스의 감독들은 미국의 범죄영화에 깊은 동경을 표했으며 실제로 자신들이 직접 필름누아르 제작을 시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액션과 스피드는 이들을 감탄케 했고 그리하여 이러한 것들을 프랑스영화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나온 작품들은 그 어떤 것도 미국영화들에 가깝게 다가가지는 못한 것들이었다. 사실 그들에게 필름누아르는 구체적인 제작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관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프랑스사회를 지배하는 진부한 것들에 대한 대안으로 제안될 만한 것들을 범죄영화의

형식에 담아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고다르가 <네멋대로 해라>에서 시작해 <미치광이 피에로> 그리고 <디텍티브>에 이르는 과정에서

계속적으로 누아르를 새로 만들면서 시도한 것도 바로 이러한 관념의 갱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필름누아르 세계로의 이 반복적인 회귀는

단순히 어떤 장르 혹은 양식을 되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화체험의 원점에 있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재발견해 영화 자체를 되살려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프랑스의 뛰어난 범죄영화들이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문제를 자주 묘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빛/어둠의

강렬한 대비에 대한 근원적인 갈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는 1950년대의 대표적인 프렌치 누아르를 살펴보기로 한다.

자크 베케르는 <현금에 손대지 마라>(Touchez pas au grisbi, 1954), <구멍>(Le Trou, 1960) 등 50년대

최고의 범죄영화를 만들어낸 감독이다. 물론 그는 스릴러 혹은 갱스터영화 전문 감독은 아니었지만 ‘지하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양식 그리고

그들간의 연대감을 대단히 예리한 감식안으로 파헤친 감독이었다. 여기서 간단히 그의 이력을 살펴보자. 우선 그가 대단히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이었고

어머니가 스코틀랜드 사람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바이링귀얼이었다는 사실은 언급해야 할 것이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한 탓인지 젊은 시절의

그에게는 다소 철없는 스노비즘이 있었던 것 같고 그런 탓인지 그가 영화에 입문할 당시에 스승격이었던 장 르누아르는 자서전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그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의 완벽한 구현이었다. 즉 그는 상류계급의 일원이었으며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자주 드나들었고 고급스러운 스포츠활동에 탐닉해 있었다.”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미국적인

것에 깊게 몰두했는데 특히 재즈에 대한 그의 열광은 도가 지나칠 정도여서 18살 나이에 뉴욕에 가서 유명 재즈 뮤지션을 만날 목적으로 대서양을

건너기도 했다고 한다.

재즈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는 그 이후 생 제르만 데 프레의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1949)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활용된다. 30년대 내내 르누아르 작품에서 조감독을 맡았던 그는 40년대 후반 <팔발라>(1947), 등 파리의 패션계,

젊은이 풍속 등을 뛰어나게 묘사한 영화로 작가적 기반을 닦았는데 특히 플롯보다는 인물에 대한 관심이 훨씬 많은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다시 르누아르의 말을 빌리자면 베케르는 “유행을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개성에 맞게 변형시킬 줄 알았고 그것은 의상뿐 아니라

소수집단에서 은밀하게 유통되는 사고 및 행동양식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르누아르 자신은 후배인 베케르가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애써 강조하지만 인물에 대한 깊은 관심 그리고 그가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두번 다시는 만들지 않았다는 점 등은 확실히 어느

정도는 장 르누아르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무드 넘치는 갱영화

<현금에 손대지 마라>는 말하자면 베케르가 갱스터들이 서식하는 어두운 세계를 자신의 미의식에 맞추어 가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 가뱅이 연기하는 늙은 갱 막스는 친구이자 파트너인 리통과 함께 오를리 공항에서 강탈한 4억프랑어치의 금괴를 현금으로 바꾸려 한다. 막스는

이 돈으로 암흑가에서 은퇴해 편안한 노후를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리숙한 리통은 그의 정부격인 젊은 댄서 조지(잔 모로)에게

이 돈에 대해 얘기를 흘리는 실수를 범하고 만다. 그리하여 조지를 끄나풀로 쓰고 있던 젊은 갱 안젤로(리노 벤추라)는 이 돈을 빼앗기 위해

리통을 끌고가 그를 인질로 막스에게 돈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친구인 리통을 살리기 위해 막스는 이 돈을 기꺼이 포기하지만 총격전

도중에 총을 맞은 리통은 중상을 입고 결국에는 죽고 만다. 막스가 친구도 잃고 돈도 놓치고 만다는 결말로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는 베케르의 영화치고는 드물게 프랑스 국내에서 흥행 성적이 아주 좋았을 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우선은 장 가뱅이라는 프랑스 최고의 스타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가뱅 덕에 이 영화가 성공한 부분 못지 않게

이 영화가 가뱅의 경력에 대단히 중요한 영화라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30년대에 <페페 르 모코> <새벽>

등의 영화를 통해 프랑스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가뱅이지만 전후에는 사실 그에게 맞는 역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상당히 침체해 있다는 인상을

주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완전히 다시 예전과 같은 대중적인 인기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영화에서 막스는 가뱅이 아닌

다른 배우가 연기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에게 적역이었다. 사실 이 영화의 성공을 계기로 가뱅하면 암흑가의 두목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강해졌고 실제로도 그 이후 늙은 갱이거나 형사 역을 맡는 영화가 많아지게 된다. 한국에서 개봉되었던 영화들만 꼽아보아도 <지하실의

멜로디> <시실리안> <암흑가의 두 사람> 등을 들 수 있다. 흔히 이 영화는 ‘무드 넘치는 갱영화’로 형용되곤 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이

영화가 범죄자들의 비정함을 묘사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일상적인 부분을 뛰어나게 묘사했기 때문에 나온 것일 게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흔히 프랑스적인 페시미즘으로 적당히 분식된 갱영화 정도로 생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의 독특함은 액션 자체보다는 막스라는 인물과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을 묘사하는 데 더 많이 치중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영화 끝부분의

도로에서의 총격전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액션장면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영화의 대부분을 점하는 것은 막스가 자주 드나드는 카페 혹은

레스토랑을 무대로 한 그의 사교생활 그리고 드물게 사업상의 상담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영화 속에서 막스 자신도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처럼 묘사된다.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막스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빌려놓은 아파트에 위기에 처한 친구 리통을 데리고

가는 대목이다. 거의 사용하지 않은 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되는 것이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 몰릴 경우에도(이 아파트는 바로 그런 목적으로 빌려놓은 것이다) 주변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물인 것이다.

<구멍>,탈옥과정 디테일하게 묘사한 걸작

하지만 이 영화가 진정으로 감동적인 이유는 이러한 미의식의 문제 이상으로 그것이 ‘나이 먹는 것’(aging)에 대한 영화라는 점에 있다.

막스는 자신이 실토하는 대로 암흑가에서 계속 일하기에는 너무 늙은 사람인 것이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그에게는 너무도

과중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미의식 자체도 이제는 낡은 것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리통의 상태가 궁금해서

그가 레스토랑에서 전화를 걸 때 그가 안경을 쓴 다음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래서 감동적이다. 그는 이미 전화다이얼 숫자를 읽기 어려울 정도로

노안인 것이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친구의 죽음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는 바로 달려갈 수 없다. 동료인 피에로가 권하는 대로 수상하게 보일

염려가 있으므로 그는 천천히 식사를 한 다음에 리통의 시신에 달려가야 하는 것이다. 주크박스에서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그리스비의 블루스’를

틀어놓은 다음 식탁으로 돌아와 데이트 상대인 젊은 여자를 슬쩍 쳐다보며 씁쓸하게 미소짓는 막스. 그것은 확실히 자신의 늙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이제 어떠한 선택도 남아 있지 않는 사내의 그것이다.

베케르의 유작이 된 <구멍>도 범죄영화 계열에 넣을 수 있는 걸작이다. 나중에 자신이 직접 감독이 되어 이류 범죄영화를 양산하게 되는 조세

조반니(호세 지오반니????)의 자전적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상테 형무소에 갇힌 5명의 죄수들이 탈옥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과정을 냉철하게 관찰하고 있는 작품이다. 베케르는 스스로를 ‘곤충학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러고보면 그의 감정을 배제한 엄밀함이

이 작품만큼 철저한 영화도 아마 없을 것이다. 영화는 미결수인 가스파르가 이미 4명이 수감되어 있는 새로운 감방으로 옮겨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가스파르는 이 네명의 사내들이 자신을 보는 눈이 그리 탐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이들이 탈출을 위한 준비를 시작한 상황에서

국외자가 찾아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가스파르가 이들로부터 신뢰를 서서히 얻기 시작하면서 탈옥 작업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감방 아래쪽으로 구멍을 파기 시작해 그를 통해 형무소의 하수구로 향하는 통로를 만들고 다시 이 하수구에서 바깥쪽의 일반 하수구로 연결통로를

만드는 과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는 마치 감방 탈옥의 매뉴얼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처럼 인물들의 개인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이

탈옥 준비의 아주 세세한 과정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바닥의 판자를 들어내고 구멍을 파기 시작하는 것에서 시작해 나중에 간수들의 순찰 시간을

정확하게 체크하기 위해 의료실에서 약병을 훔쳐 간이 모래시계를 만드는 과정 등등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정말로 현미경적으로 이들의 손의 움직임을

좇고 있는 것이다.

탈옥의 과정을 그린 점에서 당연히 이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로베르 브레송의 <저항>(원제는 <사형수 탈주하다>)과 자주 비교된다.

두 작품 모두 인물들의 개인적인 정보를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탈옥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놀랄 만큼

닮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브레송에게서 보이는 중복어법적인 내레이션 그리고 배경에 깔리는 모차르트의 음악 등을 떠올려보면 역시 그

차이점도 명확해진다. 베케르에게는 브레송에게서 볼 수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대한 지향이 없는 것이다. 디테일한 부분들의 집적을

통해 다른 어떤 것을 떠올리려는 의도 자체가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베케르가 브레송보다 더 유물론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베케르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관계의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현금에 손대지 마라>에서도 막스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서 이미 이것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항>이 처음부터 끝까지 퐁텐의 거의 유아론(唯我論)적인 모험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구멍>은 다섯명의 사내들로

이루어진 임시적인 공동체의 모험인 것이다. 그리하여 영화 전체는 가스파르가 다른 네명의 신뢰를 얻었다가 결국에는 그것을 다시 잃는 과정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도박꾼 봅>,파리라는 도시에 보내는 러브레터

삶을 장식하는 측면 즉 댄디즘의 관점에서 갱스터의 세계를 본다면 아마도 영화사상 그 정점에 위치하는 감독으로는 역시 장 피에르 멜빌을 꼽아야

할 것이다. 젊은 시절 허먼 멜빌의 소설을 읽고 너무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름까지 바꿔버린 이 사내는 미국문화에 대한 그의 동경을 서슴없이

공언해왔으며 ‘미국적’으로 보이려고 가상한(?) 노력을 기울이긴 했지만 그가 도달한 ‘포즈의 미학’은 결코 미국적인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갱들은 결과보다는 과정의 미학에 매달릴 뿐 아니라 자신들의 프로로서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열정과 ‘일’이 혼동되는

것을 별로 꺼리지 않는다. 게다가 성공적인 갱이 되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게으른 인간들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실패한

예술가에 가까워보인다(실제로 그의 많은 주인공들은 화가들이 살 법한 스튜디오형의 아파트에 산다).

멜빌의 ‘멋쟁이 갱영화’는 차라리 미국적인 것에 대한 흥미로운 오독의 선구적인 사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즉 미국적인 것으로

흔히 간주되는 범죄영화의 모든 관습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개인적인 미의식을 철저히 투사해 현실과는 전혀 관계없는 대단히 이색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멜빌의 1956년 작품인 <도박꾼 봅>(Bob le flambeur)은 왕년의 은행강도였으며 현재는 도박으로 소일하는 봅(로제 뒤센)이라는

중년사내의 일상을 보여준다. 새벽녘까지 도박장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항상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면서 옷매무새를 다듬는 이 사내에게는

로제와 폴로라는 두명의 부하가 있다. 특히 폴로는 은행강도 시절 그의 동료의 아들로 그에게는 양아들이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느슨한 리듬으로

봅의 주위환경으로 보여주는 영화는 중반 이후에는 도빌의 카지노장 금고에 있는 8억프랑의 돈을 털어 자신 생애에 있어 마지막 ‘한판’을 멋지게

장식하려는 봅과 그의 동료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치밀한 계획으로 거의 성사될 것으로 보였던 이 강탈은 위층의 도박장에 간 봅이 자신의

열정이 발동해 도박에 몰두하면서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평소에는 거의 딴 적이 없었던 봅이 그날 밤에는 3시간 정도의

도박으로 자신들이 금고에서 빼내려던 돈과 거의 맞먹는 돈을 딴다는 것이다. 엄청난 돈을 따긴 했지만 새벽에 출동한 경찰에 의해 아들이나

다름없는 폴로가 죽임을 당하고 자신도 붙잡히게 된 봅. 그의 친구이기도 한 경감은 그가 딴 돈을 보면서 이 돈이라면 우수한 변호사를 고용해

형을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듯이 말한다. 그러자 봅은 정말 최고의 변호사를 쓴다면 아마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응수한다.

그에겐 거사에 실패한 자 특유의 비장미의 기색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다.

멜빌 자신이 고백하고 있는 대로 이 영화는 존 휴스턴의 걸작 <아스팔트 정글>의 영향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를 준비하던

도중에 <아스팔트 정글>을 보고는 깊은 감동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금고털이의 과정 및 행위 자체를 휴스턴만큼 잘 처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판단해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갱영화로는 드물게 가볍고 유연한 시정(詩情)을 담는 영화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전반부의 봅이 살고 있는 몽마르트르 지역의 새벽거리를 훑어나가는 화면은 정말로 매혹적이다. 밤일을 하다가 돌아가는 사람들과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이 공간에서 봅과 안(이자벨 코리)도 마주치게 된다. 갈 곳 없는 어린 안에게 연정을 느끼면서도 결국에는

그녀를 폴로에게 양보하고 마는 봅. 물론 여기에는 온정적인 시선이 담겨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마조히즘이 숨겨져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별로 따지도 못하면서도 강박적으로 ‘자신의 운을 테스트해 볼’ 목적으로 도박에 매달리는 봅의

태도에도 잠재해 있었던 것이다. 멜빌은 이 영화를 “파리라는 도시에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말했지만 그 이상으로 이 영화는 그 공간 어딘가에

살고 있을 익명적인 영웅에 바치는 오마주이기도 한 것이다.

임재철 / <필름컬처> 편집주간 marienbar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