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인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샤를 테송 칼럼을 시작합니다. 이 프랑스 영화평론가는 범람하는 영상속에서
“중요한 영화를 고르고 미래의 영화를 발견하는 것”을 비평의 중요한 몫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시선을 아시아 영화와 그안의 한국영화까지
꾸준히 확장해왔습니다. 이제, 테송의 `선택과 옹호'를 부정기적으로 중계합니다.편집자
저무는 한해한해는 우리에게 그에 준하는 의식들을 강요한다. 우선 그해 상영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우수했던 영화 10편을 선정해야 한다.
이 목록을 작성하면서 우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게 되는데 그것은 영화애호가들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는 순간에 느끼는 유아적 환희에 가깝다.
우리는 많은 영화를 본다. 그리고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물론 글을 쓰고 싶거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의
글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공통되게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는데, 거기엔 우리를 영화애호가로 만든
요소가 내재해 있다. 한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에 관해 기록한다. 때로는 평점을 매기는(별표로) 위험을 감수하기도 한다. 그러고나선
잠시 멈춰서서 그 평점이 제대로 매겨졌는지 주의깊게 살펴본 다음 다른 작품으로 넘어간다.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영화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감상한 모든 영화들에 대해 기록하는 작업을 마친 뒤 (열광적이면서도 감격스러운 이 작업을 좀더 분석적인 글쓰기에 선행하는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들만 따로 모아 리스트를 만듦으로써 비할 데 없는 만족감을 가지게 된다.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
요구되는 규칙은 경이로운 숫자인 ‘10’에서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매년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위원들은 그들이 추천한 영화들과 <카이에…>가 옹호했던 영화들이 때로는 충돌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모든 연인들의 사연처럼 각 편집위원들이 <카이에…>의 편집 방향과 더불어 형성해온 그들의 상상적 타자― 그들의 천국과 지옥― 의 이미지에
충실하면서도 배반적인 일종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선별 작업에서도 주위를 바라보는 시력을 잃는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기 자신을 되찾음으로써 느끼게 되는 기쁨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위험없이 어떤
그룹의 일부가 되기란 불가능하다.
2000년 리스트에는 아시아영화가 세편이나 들어 있다. 그것은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리안의 <와호장룡>, 왕가위의 <화양연화>다.
20년 전부터 꾸준히 그리고 심도있게 이 감독들을 주목해온 비평가들의 작업이 이제서야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지만 중요한 점은 다른 데
있다. 그 이전 할리우드영화가 관객 곁에서 누렸던 반응들을 세계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영화가 차지함으로써 유례없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장르영화와 액션영화에 속하는 <와호장룡>은 수준높은 대중오락영화인가 하면, <화양연화>는 사랑하는 감정의 정지상태를 표현한 관능적인 로맨스다.
할리우드영화들은 부동의 스타를 길러냄으로써 전세계인을 꿈꾸게 만들었지만 오늘날 이 꿈의 대상은 아시아 스타에게로 이전되었다. 대부분의 미국영화
배우들은 대형 스크린에 데뷔하기도 전에 시트콤에 흡수돼 버린다. 다시 말해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기도 전에 고갈돼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때로 그 가치가 인정된다 하더라도 대체로는 저속함만이 판치는 세계에서 어느 정도 우아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그들의 능력만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그에 따라 배우적 가치가 매겨진다. 그렇다면 대체 영화만이 관객에게 줄 수 있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이나 숭고함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중국이다. 왜냐하면 남자가 달에 있다면(밀로스 포먼 감독의 <맨 온더 문>(Man on the Moon)은 찰리 채플린의 <뉴욕의
왕> 이후 영화가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 여자는 ‘무드에 젖어 있기’(<화양연화>의 영어제목이 ‘In the Mood
for Love’-역자) 때문이다. 장만옥은 얼마나 멋진가! 왕가위 신드롬에서 주지해야 할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거다.
오랫동안 홍콩영화는 극장에서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남자들의(브루스 리, 성룡) 세계를 조명해왔다. 그렇지만 여자들 또한 아주 일찍부터 구체적으로
20년대 상하이에서 촬영한 로맨스영화와 무술영화에 등장시켰다. 우시아피안(Wu xia pian)에서 탄생한 여검객은 <무명의 영웅들>(1926)의
여주인공인 쉬안징린(Xuan Jinglin)으로부터 호금전의 <대취객>(1966)의 여군주 쳉페이페이(그녀는 <와호장룡>의 악녀로도 출연했다),
그리고 무한한 매력과 재능을 지닌 양자경에 이르기까지 그와 더불어 성장했다.
우리는 할리우드 안에서 용해될 소지가 다분한 홍콩영화가(오우삼의 말에 따르면 이게 그의 마지막 임무라고 한다) 그에 흡수·통합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현실을 바라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카이에 뒤 시네마> 2001.1월호)
샤를 테송 /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파리3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