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설 연휴엔 15년 만에 외가를 찾았다. 나에게 외가는 언제나 친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며 다정하게 소란스러운 공간으로 남아 있다. 그 기억이 15년 전 다소 갑작스럽게 단절된 건 외할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방학 때마다 시간을 내 부러 찾곤 했던 외할머니의 공간에, 당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로 방문할 용기가 부족했던 것 같다. 2010년대를 훌쩍 떠나보내고 다시 찾은 외할머니의 정원은 태연자약하도록 그대로였다. 작은이모와 나는 그곳에 잠시 서서 고인의 부재를 사이에 두고 과거형의 대화를 나눴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온갖 종류의 죽음을 간접 체험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음에도, 가까운 곳에 존재하던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오랜만의 외가 방문에 이어 예기치 못한 부고 소식을 여러 차례 들으며 설 연휴를 보내고 나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1월 말이다. 지난 1월 25일에는 <살기 위하여>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을 연출한 다큐멘터리스트 이강길 감독의 부고를 접했다. 발인을 앞두고 열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낭독한 황윤 감독에 따르면, 이강길 감독은 열흘 전 전주에서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을 상영한 뒤 황윤 감독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할 때만 하더라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 시작된 감기”가 급성 백혈병이 되어 4일 만에 목숨을 앗아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연휴 기간의 SNS엔 이강길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하는 영화인들의 추모글이 끊이지 않았다(2004년 제1회 부안영화제에서부터 이강길 감독과 인연을 맺은 다큐멘터리 감독 안창규의 추모 에세이에 더 자세한 사연을 실었다). 그로부터 하루 뒤엔 NBA 스타 코비 브라이언트가 헬기 추락 사고로 딸과 함께 세상을 떠났으며, 연휴가 끝난 뒤 출근한 첫날에는 윤이형 작가가 작품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마저도 어떤 죽음의 연장선으로 느껴지는 건 기분 탓만이 아닐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갑작스럽고 폭력적으로 닫힐 때마다 그 단절을 목도한 자로서, 같은 자리에 남게 된 사람으로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실의 감정들을 근심하게 된다. 이기적이게도 그러한 감정들이 나의 세계에 어떤 균열을 낼지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남긴 것을 반추하고 미처 마무리짓지 못한 무언가를 이어가는 것 또한 상실감과 함께 남은 자들이 끌어안아야 할 업보일 것이다. 고 이강길 감독은 <설악, 산양의 땅 사람들>의 마지막 상영회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막아내는 투쟁에 성공한다면 영화의 마지막 대목을 해피 엔딩으로 수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종영되었지만 그가 남긴 영화는 현실에서 해피 엔딩을 맞을 수 있을까? 코비 브라이언트가 찬사를 보냈던 르브론 제임스는 앞으로도 득점왕으로 승승장구할 것인가? 윤이형 작가가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온 문단 내 성폭력은 개선될 수 있을까? 떠난자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엄혹한 세계 속에.
p.s. SF 작가인 정소연 변호사가 ‘디스토피아로부터’ 지면의 새로운 필자로 합류했다. 공교롭게도 이번호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잡지의 시작과 끝을 열고 닫게 됐는데, 죽음과 마주하는 법에 대해 쓴 정소연 변호사의 첫 글을 정독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