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이 끝나면 죽음이 온다. 곡이 다시 시작되면 다시 살아나는가. 그저 곡이 끝날 때마다 한번의 죽음이 온다. 곡이 연주되는 동안에는 살아 있다. 복잡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침묵을 견디기 어려운 사람들이 시간을 분절해 감각하는 방법으로 음악을 택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천희란의 소설 <자동 피아노>는 20여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챕터는 숫자로만 명명되어 있지만, 챕터마다 피아노곡이 한곡식 매칭되었다. 여기에는 줄거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으며, 다만 곡이 하나 시작되면 생각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생각이 어디로 굴러가는지를,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 쪽은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곡이 끝나면 (아마도) 한번 죽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가 죽일 수 있는 대상이라고는 나밖에 없으니까.” “휴식이란 겨우, 불안한 나의 뒷모습에 액자를 씌우고 잠시 바라보는 일.”
챕터별로 매칭된 피아노곡을 듣는 것은 <자동 피아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각 챕터의 글이 매칭된 곡과 일치하는 무엇인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피아노곡에는 가사가 없다. 곡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글로 헤아리는 일이 가능하다면 애초에 곡으로 쓰이지 않았으리라. 여기에는 음표들이 있고 연주자의 움직임이 있다. 그래야 연주가 가능해진다. 그러니 곡이 연주되는 동안은 살아 있을 수 있다. 곡이 끝난 뒤, 세상이 존재하는지를 누가 증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옷장에 무서운 것이 있는 것 같다면서 옷장 문을 연다. 거기에 무서운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 옷장을 열면 옷이 걸려 있다. 쫓아내려고 문을 열어도 문을 열면 쫓아낼 수 없는 무서운 것.” 글로 쓸 수 없는 것을 쓰려고 시도하는 일이야말로, 옷장 안의 무서운 것을 어떻게든 증명해보려는 시도와 같지 않을까. 증명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증명이 불가능함을 반복해 보여주는 사이에 우리는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앞에 있고, 우리 안에 있고, 증명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그러니 가능한 작별 인사를.
음악이 문장이 된다면
고독이 깊어진 결과인 줄도 모르고, 고독해지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인 줄 알고,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려고, 아무런 표정이 없어서 어떤 표정도 그려 넣을 수 있는 얼굴을 썼다. (<자동 피아노>, 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