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제작되는 남북 분단 소재의 영화 중 관객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유형은 현재의 남북 관계를 토대로 ‘만약에’라는 서사적 가정을 결합시키는 작품들이다. <강철비>와 <백두산>은 모두 현 남북 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인 북핵 문제를 중심에 두고 쿠데타와 백두산 폭발이라는 서사적 가정을 결합하여 겨울 시즌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이 두 작품 모두 재난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장르를 경유해 서사를 전개하지만, 한반도를 위협하는 사건의 해결에 다가갈수록 ‘버디무비’의 특징을 강화해간다. 버디무비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두 인물이 서로 티격태격하면서도 주어진 난관을 함께 극복하는 특징을 갖는 것처럼, 이들 영화의 남북 요원들 역시 한반도를 덮친 위기를 함께 극복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문화적 차이를 지워내고 ‘우정’을 쌓아간다. 이 글은 이 우정에 대한 의심이자 그 우정의 수사에 내재한 우리의 정치적 무의식에 관한 것이다.
우정이라는 착시효과
버디무비답게 <강철비>와 <백두산>의 인물들은 성격의 차이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을 보이긴 하지만, 그 대립은 주로 인물 내적인 차이보다는 남북이라는 외재적 삶의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우정의 핵심은 이 환경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달려 있으며, 무엇보다 이는 이들의 우정을 하나의 알레고리로 접근하려 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외재적 삶의 환경에서 오는 차이를 굳이 극복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 차이를 극복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절체절명의 위기가 그 대립적 차이를 아주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면서 우정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우정은 한반도를 덮친 위기가 만들어낸 일종의 착시효과다. 하긴 당장 한반도가 무너진다는데 남북의 차이 따위가 뭐 대수겠는가?
그렇다면 이 거대한 위협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들의 우정은 가능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백두산>과 <강철비>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확인할 수 없다. <백두산>의 리준평(이병헌)과 <강철비>의 엄철우(정우성)는 스스로의 목숨을 대가로 한반도를 위기에서 구한다. 이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이들의 우정은 영원한 기억으로 박제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요원들이 생존에 성공했다 한들 과연 이들의 우정이 계속될 수 있었을까? 나는 이들의 죽음을 보며 자신이 지켜낸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저 멀리 떠나야 했던 ‘서부의 사나이’가 떠올랐다. 서부의 사나이가 마을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을이 위기에 처했을 때이다. 서부의 사나이가 폭력으로 또 다른 폭력을 제압해 마을에 평화가 찾아오면 그들은 마을의 안정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것이 그들이 자신이 지켜낸 마을을 떠나는 이유다.
<백두산>과 <강철비>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는 위기 앞에서의 우정은 상상할 수 있지만, 위기가 사라진 안정된 사회 속에서의 우정은 상상할 수 없다. 사회적 위기가 사라지면 착시도 사라진다. 이는 영화적 상상력의 한계 지점이면서 한국사회가 이질적 타자와 공존할 수 있는 한계 범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우리가 아닌 이질적인 타자와의 우정을 말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착시효과로서의 우정일 뿐.
자발적 희생이라는 무언의 강요
이 우정의 판타지의 정점은 북한 요원이 자기희생의 결단을 내리는 순간이다. <강철비>를 보면서 엄철우가 암에 걸렸다는 것으로 그의 숭고한 죽음을 예고할 때, 나는 이 설정이 왠지 비겁하다고 느꼈다. 엄철우가 암에 걸려야 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도록 하기 위한 서사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는 그가 애초에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희생에 대한 죄의식을 덜 수 있게 해준다. 어차피 죽을 자라면…, 이라는 안도 또는 위로. <백두산>은 이러한 구구절절한 알리바이 없이 리준평의 자기희생으로 나아간다. 딸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아비이자 약물중독자인 부인에게 총을 겨눠야 하는 남편이라는 설정에서부터 그의 비극이 어느 정도 예고되긴 했지만, 그의 자기희생은 서사적 동기화보다는 우리가 사는 ‘현실 원칙’에 입각해서 이뤄진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자기희생에 대해 우리가 던져야 하는 첫 번째 질문은, 왜 이러한 희생이 항상 북한 요원의 몫이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 사회가 이야기하는 우정의 실체이자 우정에 관한 우리의 서사적 상상력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이들 영화가 제기하는 남북문제라는 대립적 상황을 좀더 넓혀 상상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북한이라는 대립적 대상과의 우정에 관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화해의 길이 보이지 않는 다양한 적대적 관계로 찢겨 있는 한국 사회가 통합의 서사를 이야기할 때 그 과정에 어쩔 수 없이 끌려나오는 우리 사회의 정치적 무의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리준평이 자신을 희생한 대가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이지만, 그 실질적인 대가는 영화의 엔딩에서 우리가 만나는 중산층 가정의 행복한 한때의 모습이다. 리준평의 딸 순옥은 잃었던 말을 되찾은 채 조인창(하정우) 가족의 완전한 일원이 되어 있다. <백두산>은 리준평이 희생한 대가로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한 미래를 그린다. 지금의 한국영화에서 리준평이 살아남고 조인창이 죽는 설정은 상상하기 힘들다. 행여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이러한 분위기의 엔딩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리준평의 자기희생과 이 엔딩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인다면, 그리고 순옥의 행복한 미소에서 관객이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면 그것만큼 잔인한 일이 또 있겠는가? 이 엔딩을 두고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순옥에게 행복한 미소를 안겨주기 위해서는 조인창과 리준평 중 누가 살아남는 것이 더 ‘유리’할까, 라는 무의식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만들어진 엔딩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리와 불리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판단한 결과다. 우리의 역사는 안정, 통합, 발전이라는 미래를 향한 서사에서 사회적 약자의 희생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또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무의식적 버릇’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강의 기적 운운하며 한국의 근대사를 이야기할 때 지겹도록 들은 역사적 합리화의 수사다. 이러한 자기희생은 자발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지금까지 우리의 역사가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온 무언의 강요의 결과다.
리준평의 자기희생은 한국 사회의 발전과 행복한 미래를 위해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답해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리준평의 자기희생과 그 엔딩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느꼈다면, 그것은 우리 또한 이러한 역사의 공모자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백두산>의 리준평은 우리의 역사가 오랫동안 약자에게 주입시켜온 자기희생이라는 무언의 강요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착한 약자’일 뿐이다. 지금의 한국영화가 꿈꾸는 우정(통합의 서사)은 이 ‘착한 약자’와만 가능하다. 결국, 자기희생의 숭고한 존재인 리준평은 북한이 아닌 한국 사회의 미래를 향하는 역사적 서사가 만들어낸 마리오네트다. 이제 우리는 그 줄을 끊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