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 에넬
Adele Haenel
바텐더 드니스로 활약한 이 배우가 낯익다. 그녀의 정체는 프랑스의 촉망받는 배우 아델 에넬. 아트 필름을 사랑하는 한국 관객들이라면 이미 몇 차례 스크린에서 그녀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16일 개봉 예정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자르영화제의 문턱을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이 배우. 아델 에넬은 누구일까?
어디서 봤더라?
아델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면, 아마도 <언노운 걸>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의 2017 년작 <언노운 걸>에서 그는 주인공 의사 제니를 연기했다. 감정을 통제할 줄 아는 유능한 의사 제니가 어느 신원미상 소녀의 죽음을 맞닥뜨리고, 죄책감에 휩싸여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는 내용. 등장인물이 많지 않고, 그들 캐릭터의 세밀한 감정을 담는 데 주력하는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가 아델 에넬의 집착적인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지난 2018년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로빈 캉필로 감독의 퀴어 영화 <120BPM>에서도 아델이 등장했다. 1989년, 에이즈 확산에 무책임한 정부와 제약회사를 향해 운동을 벌이는 단체 ‘액트업파리’의 활동을 조명하는 <120BPM>. 아델 에넬은 액트업파리의 일원이자 레즈비언인 소피 역할로 인상적인 조연을 빛냈다. 지난해 봄에 개봉된 <원 네이션>을 통해서는 18세기 파리 혁명을 이끈 당찬 캐릭터 프랑수아즈로 변신했다.강렬한 데뷔작 <악마들>
아델 에넬은 예술인들이 거주하던 프랑스 북부의 몽트레유 인근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배우와 영화 제작자들을 쉽게 마주치던 그곳에서 자연스러운 영향을 받아 배우가 됐다. 데뷔 영화는 2002년작 <악마들>. 당시 그는 13세였다. 아역 배우들의 힘 만으로 끌고 가는 영화임에도 서사의 강렬함은 상상 이상이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어린 10대 남매가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서로에게만 의지한 채 거처를 찾는 이야기다. 자폐 증세가 있는 클로에를 연기한 아델 에넬의 연기력은 금세 화제를 불러 모았고, <악마들>에는 ‘유년판 <베티블루>’라는 별명도 붙었다.세자르영화제 단골 방문
프랑스의 오스카라 불리는 세자르영화제. 간단히 말해 프랑스의 가장 명망 있는 ‘로컬 영화제’다. 아델 에넬은 지난 10년간 세자르영화제에 총 6번 노미네이트됐고 그중 2번의 수상을 했다. <악마들> 이후 한동안 작품이 없었던 그는 차기작 <워터 릴리스>와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으로 두 차례 신인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그 후 <수잔>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싸우는 사람들>로는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다. 참고로 그녀가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120BPM>은 2018년 제43회 세자르영화제의 1등 상에 해당하는 최우수작품상 수상작이다. 지난해는 코미디 영화 <트러블 위드 유>로 여우주연상 후보를 꿰차기도 했다. 현재 그의 나이 서른하나에 이룬 성과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화려한 기록.
타고난 작품 선구안?
그렇다면 아델 에넬은 타고난 선구안을 가진 배우일까? 절반 정도는 맞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경력을 채운 20편의 영화들에는 찬사를 받은 작품도, 그렇지 않은 작품도 섞여 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볼 순 있을 것이다. 아델 에넬은 안전한 선택보다는 새롭고 모험적인 선택에 끌리는 사람이라는 것. 강렬한 연기를 보인 데뷔작 <악마들> 이후 그는 수중발레 선수, 매춘부, 의사, 혁명가, 사회운동가, 형사 등 경계 없는 역할들에 도전해 왔다. 실제로 신인 감독의 입봉작에 종종 뛰어들기도 하는 그인데, 이에 대해서는 “약간 흐트러진 에너지와 열정을 좋아한다. 영화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에 끌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을 했다. 그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신선함의 원천이지 않을까.
다르덴 형제가 선택한 두 번째 프랑스 배우
주로 벨기에의 무명 배우 혹은 비전문 배우를 기용해 영화를 찍는 것으로 알려진 다르덴 형제 감독. 그들이 잘 알려진 유명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서 해고 반대 서명을 받으러 동료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던 산드라. 이 역할을 소화한 프랑스의 유명 배우 마리옹 꼬띠아르가 그 최초 사례였다. 이후 <언노운 걸>의 주인공으로 발탁된 아델 에넬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 등장한 두 번째 프랑스 배우가 됐다. 애초 <언노운 걸>의 의사 제니 역은 나이가 더 많은 여성 배우를 위한 자리였지만 다르덴 형제는 아델을 위해 배역의 나이를 수정하기까지 했다.
올해의 기대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개봉을 앞둔 아델의 신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벌써부터 관심이 뜨겁다. 각종 영화제를 통해 소개돼 뜨거운 지지를 받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네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그동안 이어온 여성 퀴어 서사의 큰 획을 긋는 영화가 됐다. 제72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 후보에 올랐을 뿐 아니라 각본상을 수상했다. 아델 에넬은 초상화의 모델이 되는 귀족 가문의 딸 엘로이즈 역할로 열연을 펼쳤다. 매 프레임이 한 폭의 그림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모델과 화가의 필연적인 시선 교차를 농밀한 섹슈얼리티로 엮어낸 수작이다. 벌써 각국의 다수 LGBTQ 영화제에 초청돼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셀린 시아마 감독
셀린 시아마 감독은 아델 에넬의 커리어뿐만 아니라 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찍기 전 원만하게 이별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워터 릴리스>로 처음 인연을 쌓은 두 사람은 오랜 기간 연인 사이였다. 아델이 배우로 활동한 대부분의 시기에 해당하는 10여 년의 세월은 셀린 시아마와 함께였다. 현재 아델은 2018년 이후 일렉트로닉 펑크 밴드 ‘섹시 스시’의 멤버 줄리아 라노에와 교제 중이다. 시아마 감독은 소녀들의 성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데뷔작 <워터 릴리스>를 시작으로 <톰보이>, <걸후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자전적인 화두를 섬세하고도 인상적으로 그려내며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고 있다.
크리토프 뤼지아 감독 성추행 고소
지난해 말, 아델 에넬은 충격적인 소식으로 프랑스 영화계를 놀라게 했다. 10대 시절 영화감독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당해온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것. 놀랍게도 그녀의 데뷔작 <악마들>을 감독한 크리토프 뤼지아가 가해자로 지목됐다. 아델에 따르면 뤼지아 감독은 13살의 그녀를 집으로 초대해 신체 접촉을 시도했고 국제영화제 참석 자리 등에서 수년간 성추행을 일삼았다. 이를 부인하던 감독은 “애정을 표현한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었을 줄은 몰랐다”며 “용서를 빈다”고 사과했다. 프랑스 매체 <미디어파트>는 “자체 조사를 통해 어린 배우들에 집착을 보인 뤼지아 감독의 행동에 관한 증언을 다수 확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델 에넬은 “당시에 느꼈던 혼란과 불쾌감이 부당한 폭력에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