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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의 중력> 정성일 감독 - 임권택이라는 중력, 영화로만 말할 수 있는
송경원 사진 최성열 2020-03-12

정성일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를 설명할 단 한 문장이 허락된다면 이렇게밖에 답할 수 없다. 정성일은 누벨바그 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와 지금 우리 앞에 떨어진 존재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가 있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글로 표현하고, 끝내 영화를 만들기. 정성일은 시간을 거슬러 이 고색창연한 명제를 직접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애정과 영화의 가치를 증명한다. 모든 평론가에겐 각자의 감독이 있는데 정성일에겐 임권택이 있다. 그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임권택 감독을 말해왔다. 1987년 <한국영화연구1: 임권택>, 2003년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뿐 아니라 2012년부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임권택X102>로 연재를 진행 중이다. 그런 정성일이 감독이 되어 임권택에 대한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떠오른 질문은 하나다. 당신 안에 더이상 임권택에 대해서 질문할 것이 남아 있는가. 정성일은 답한다. “임권택 감독의 작업을 설명하는 것이라면 글로 완전히 만족했을 것이다. 내겐 그 이상의 순간들이 필요했다. 임권택 감독은 시스템으로 영화를 찍는 분이다. 많은 스탭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의 마에스트로 같은 존재다. <취화선>의 현장에서 글의 무력감을 새삼 느꼈다. 글로 옮길 때는 어떤 포인트만 기술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연출방식은 총체적인 과정이 진행되는 가운데 순간적으로 어떤 감흥을 잡아내고 반응하여 연출로 구현하는 식이다. 여기엔 정해진 패턴도 법칙도 없다. 반복되고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불현듯 찾아오는 성질의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매 순간의 프로세스를 찍어 보여주는 것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 때문에 글로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로 포착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 역시 정성일을, 그리고 그의 영화를 설명함에 있어 무력감을 느낀다. 아무리 긴 글을 쓰고 말을 보태도 허기를 메울 수 없음을 깨닫고 욕심 부리지 않기로 했다. 미처 전하지 못한 수많은 문답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선 <녹차의 중력>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정리한다. <녹차의 중력>과 <백두 번째 구름>은 반드시 한 호흡으로 이어서 보고 논의되어야 할 영화다. <백두번째 구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한달 뒤 영화 개봉과 함께 이어갈 것이다. 여기 정성일의 중력, 언어의 맛을 먼저 전한다.

-지난해 이맘때 <천당의 밤과 안개>(2017)로 인터뷰를 했다. 딱 1년 만에 <녹차의 중력>이 개봉한다. 이제야 개봉한다고 해야 할까. 예상보다 빠른 개봉이라 다행이라 해야 할까.

=언제 개봉하느냐에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묵묵히 버티는 시간에 대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니까.(웃음) 신경 쓰이는 건 관객을 만나는 형태다. 다행히 <녹차의 중력>이 11월 28일 개봉하고, <백두 번째 구름>이 한달 뒤인 12월 말경 개봉할 예정이다.

임권택을 말하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간다. <녹차의 중력>은 영화를 기다리는 임권택의 시간을 담았고, <백두 번째 구름>은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인 <화장>(2014)의 촬영현장에서 거장의 비밀을 캐낸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전혀 다른 성취를 보여준 영화지만 본질적으로는 한몸이나 다름없다.

=매 순간 모든 영화와의 인연에 감사한다. 전작 <천당의 밤과 안개>는 왕빙 영화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기에 개인적으로도 각별하다. 그 연장선에서 임권택 감독님을 영화로 담을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1987년 <한국영화연구1: 임권택>을 쓰기 위해 첫 인터뷰를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분을 만나왔지만 영화로 담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 처음으로 영화가 아니면 안되겠다고 느낀 건 2002년 <취화선> 촬영 현장 때였다. 그때 <씨네21>의 청탁을 받아 현장 취재기를 썼는데 임권택의 메소드를 글로 기록하는 데 한계를 느꼈다. 오직 영화로 찍을 때에라야 현장의 프로세스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때부터 <화장>의 현장에 가기까지 1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 프로젝트를 들고 인천다큐멘터리포트 지원을 신청한 적이 있는데 그때 변영주 감독이 심사위원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영화는 30년을 준비한 영화입니다. 그래서 더 준비할 수가 없는 영화입니다.” 타인의 입을 빌려 이야기될 때 새삼 임권택 감독님과의 인연을 되새기며 자각할 수 있었다.

-<녹차의 중력>은 임권택이 누구인지,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차라리 임권택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성일의 리액션, 혹은 에세이처럼 보인다.

=대개 인물다큐멘터리는 대상의 이면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은 비하인드 스토리랄 게 없는 분이다. 그분에 대한 자료와 설명은 이미 차고 넘치기에 임권택의 작품을 소개하거나 그분의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내가 임권택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하니 ‘두 시간 동안 임권택 완전정복’ 같은 걸 예상한 분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임권택 감독의 영화들과 명장면을 뽑아서 코멘터리를 하라고 하면 나보다 잘할 사람이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론 한 예술가의 여정에 대해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녹차의 중력>은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찍겠다고 기획한 결과물은 아니다. <화장>의 현장을 찍기 위해 기다리다가 시간이 쌓였고, 결과적으로 <녹차의 중력>과 <백두 번째 구름>이라는 두편의 전혀 다른 영화(동시에 같은)로 완성되었다.

=감독님을 찾아가서 ‘감독님의 현장을 찍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 나도 그렇고 감독님 스스로도 금방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원래는 한편의 영화였고 기다리는 시간은 영화 앞부분에 짧게 넣을 요량이었다. 두편을 분리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세례식에서였다. 감독님이 누군가에게 몸을 완전히 맡기는 의식을 지켜보면서 별반 할 일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며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의 영화도 절반은 기다리는 시간이었겠구나.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시간은 마땅히 한편의 영화가 될 수 있겠구나. 기다리는 걸 보여주는 영화와 촬영 현장을 따라가는 영화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대상의 다른 시간을 담는다는 것. 나에게도 선물 같은 시간이자 배움의 시간이었다.

-형식적으로 보면 몇 가지 원칙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 흔한 내레이션이 없고, 대상을 향한 질문도 없다. 심지어 임권택 영화의 스틸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원칙은 단 하나였다. 임권택을 찍는다. 그의 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그의 기억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오직 임권택이라는 존재를 찍고 싶었다. 감독님이 동서대학교에서 강의하던 중 유일하게 당신의 영화 인생을 이야기한 강의가 있었는데 그때 촬영감독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영화 스틸이 찍히는 걸 피하라고 했다. 내가 보고 싶고 궁금했던 건 감독님이 스스로의 영화를 설명할 때의 표정이었다. 어둠 속 스크린에 반사된 빛이 임권택 감독의 얼굴에 비칠 때 스크린이 된 임권택의 얼굴이 임권택의 영화에 대한 리버스숏이 되는 거다. 아마 <녹차의 중력>을 보면서 임권택의 영화가 궁금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분들은 영화를 찾아보길 권한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임권택의 얼굴이고, 그 얼굴을 음미하는 건, 비유하자면 녹차를 우려 마시는 것과 같다. 긴 시간 동안 우려낸 한 사람의 삶과 반응들이 거기에 있었다. 임권택이 어떤 사람일까. 긴 세월 101편의 영화를 찍은 사람, 그리고 102번째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 강의를 마치고 동서대학교를 나서는데 바로 앞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날 마침 구름이 지나가는데 그 형상을 보는 순간 문득 ‘이 사람은 나무처럼 이렇게 버틴 끝에 커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나무를 카메라에 담았다.

<녹차의 중력>을 말하다

-당신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뭉갤 수도 있는 지점에서 집요하게 다시 임권택이라는 질문을 시작해왔다. 나 역시 일일이 의미를 묻는 대신 정성일이 영화를 찍은 순서대로 따라가며 도움을 받고자 한다. 우선 임권택 감독이 녹차를 따르는 장면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이 오프닝만큼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들었다.

=굉장히 오랜 시간 마음에 품었던 첫 장면이다. 감독님을 찾아뵈면 맨 처음 하시는 일이 녹차를 끓여주는 거다. <만다라>(1981) 때 인연을 맺은 선암사 주지스님이 매년 보내준다. 결국 거기에도 영화가 깃들어 있는 셈이다. 감독님이 끓여준 녹차를 마시기 전엔 녹차를 즐겨 마시지 않았다. 감독님 댁에서 마시면서 이게 진짜 맛있는 차라는 걸 깨달았다. 녹차를 우려내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을 선물하는 건 임권택이 사람을 만나는 방식이다. 아마 다시 영화를 찍는다고 해도 첫 장면만큼은 녹차가 될 것이다. 감독님이 덜덜 떨리는 손을 굳이 보여주면서 번거롭게 차를 끓여준다는 건 그의 정직성과 투명성을 보여주는 거다. 꼿꼿하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사람을 마주한다는 것. 관객이 그 모습에서 그의 인격을 보아주길 바랐다.

-매번 녹차를 우려주셨을 텐데 수많은 녹차 중에 그 화면을 쓴 이유가 있나.

=녹차를 우리는 장면은 딱 한번 찍었다. 이런 종류의 일은 두번 할 수도 없고, 두번 할 필요도 없다.

-영화를 보기 전에 <녹차의 중력>이란 제목을 봤을 때 다소 허세가 묻어 있다고 생각했다. 매우 문학적, 은유적이면서 한편으론 지나치게 익숙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오프닝을 마주한 뒤 단번에 납득이 되었다. 녹차를 우리는 임권택 감독의 육체에서 그야말로 세월이라는 중력이 느껴진다. 최근에 본 <아이리시맨>의 엔딩 장면도 생각이 났다. 온몸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세월의 무게에 저항하고 있는 존재가 우리 눈앞에 당도한다.

=녹차는 중력이 없으면 우릴 수 없는 차다.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이 있기에 차가 우려져 나온다. 한국의 근대사는 임권택이란 영화를 계속 발목잡고 잡아당겨왔다. 그런데 이분이 부서지지 않고 그걸 향기나게 만든 끝에 우리가 101편의 영화를 만날 수 있었던 거다. 중력이야말로 임권택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단어다. 점점 아래로 가라앉아가는 육체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녹차를 우리는 사람. 녹차의 맛은 정말 설명하기 어렵지 않나. 임권택이란 세월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감독님이 정말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국민감독’인데 나는 그가 그렇게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중력 안에서 녹차처럼 우러나온 사람. 그게 지금의 내가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운명처럼 정해져 있는 당연한 오프닝을 지나 바로 이어지는 시퀀스는 적지 않게 당황스럽다. 임권택 감독의 둘째아들 권현상 배우가 젊은 임권택 감독이 되어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 시절의 자신을 구술한다.

=임권택 감독 본인도 둘째아들이 자신을 연기했다는 걸 영화를 보기 전까진 모르셨다. (웃음) 나는 권현상군이 5살 때부터 봤다. 채령 여사가 말하길, “시어머님 말씀이 둘째가 임권택 감독님 어릴 적이랑 똑같다”고 하셨다. 그 말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님은 본인의 입으로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하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 워낙 많이 이야기한 탓에 매뉴얼화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의 두 자제와 이야기하다가 인상적인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가 이런 생을 살았다는 걸 나의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고 하는 거다. 마침 촬영할 즈음 권현상군의 나이가 임권택 감독의 데뷔 시기와 똑같았는데 그것도 기분 좋은 우연이었다. 아마 권현상군이 배우가 아니었다면 부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엔 못하겠다고 했는데 권현상군에게 ‘당신이 아버지를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설득을 했다. 아버지인 척 연기하는 배우를 보고 싶은 게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아버지를 느껴보는 아들을 찍고 싶었다.

-다음으로 임권택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보여준다. 360도의 느린 패닝숏으로 학교의 모습을 찬찬히 훑은 뒤 오래된 정자에 머무는데 그 옆에 포클레인이 서 있다. 녹차를 우리는 임권택, 데뷔작을 말하는 임권택(권현상), 그리고 어린 시절 임권택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공간. 이렇게 세 장면이 이어지며 하나의 시퀀스를 만들어낸다.

=감독님이 다녔던 학교는 옛날 모습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나도 찍으러 처음 가보았는데 학교 주변 풍경이 다 망가져 있었다. 모습이 바뀌었다가 아니라 망가졌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그 모습들을 360도로 전부 담았다. 오래된 정자의 경우, 마침 그 자리에 있던 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나이보다 오래된 정자라고 말씀해주셨다. 학교부터 정자까지 한번에 이어지는 호흡. 그리고 마침 선물처럼 주변에 공사를 해 중장비들이 서 있었다. 이걸 보여주면 아침마다 이 학교를 다녔던 그분의 시간을 보여줄 수 있겠다고 느꼈다.

-이 장면 역시 의미 부여를 하고 말로 옮기면 촌스럽다고 생각될 만큼 정확하다. 일부러 포클레인을 동원해 연출을 한 것처럼 말이다.

=그 정도 제작비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웃음) 다큐멘터리는 선물이고 인연이며 기다림이다.

-이어지는 장면은 임권택 감독님이 동서대학교 강의를 위해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는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오프닝의 녹차를 우릴 때 손을 떠는 장면에서 육체의 버거움이 느껴졌다면 이번에는 그야말로 땅으로 꺼질 듯이 의자에 잠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잠이 든 임권택의 모습 뒤로 차창 너머 배경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마치 세월이 지나가는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처럼 카메라는 한동안 차창 밖의 흐르는 이미지들을 주시하다가 이윽고 <흥타령>이 나온다. 마치 꿈속의 임권택이 듣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부산행 기차에 타자마자 주무신다. 솔직히 나도 그렇게 빨리 주무실 줄 몰랐다. (웃음) 임권택 감독님이 바깥 풍경을 쳐다보는 걸 본 적이 없다. 지겨운 거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가는 동안의 풍경을 그는 얼마나 수없이 보아왔을까. 한편의 영화를 찍기 위해 전국을 누빈 그는 이 풍경을 얼마나 많이 마주했을까. 임권택은 부산에서 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영화를 시작한 사람이다. 그때 어떤 심경이었을까. 그런 사람이 다시 기차를 타고 자신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갈 때 어떤 기분일까. 그거야말로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다 꿈이로다”. 감독님이 주무실 때 지나가는 풍경은 꿈결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흥타령>은 감독님 영화에도 여러 차례 나온다. 감독님이 이 판소리를 자신의 주제가처럼 여기시는 것 같다. 아마도 그 가사에 자신의 삶이 묻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녹차의 중력>의 이미지는 임권택 본인을 제외하곤 대부분 비켜 찍거나 흘려보내는 게 많은 반면 <흥타령>처럼 사운드와 음악은 매우 정확하게 들려준다.

=심지어 행여나 가사를 놓칠까 가사까지 적어 보여주지 않나. (웃음) 맞다. 정확하게 그렇게 했다. 의외로 사운드는 쉽게 찾아왔다. 가령 나는 임권택의 영화적 결론이 <춘향뎐>(1999)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수많은 영화를 찍은 여정 끝에 결국 판소리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판소리와 같은 형식의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의 <흥타령>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마찬가지로 동서대학교 강의에서도 <춘향뎐>을 보여주는데 <춘향뎐>의 소리를 듣고 있는 임권택의 얼굴, 말투, 몸짓을 담아내는건 내게 있어 필연이었다. 어려운 건 이미지를 고르는 작업이었다. 부산행 기차의 전 구간을 다 찍었는데 그중 영화에 담긴 딱 그 순간이 내가 생각하는 감독님의 마음의 풍경을 오려낸 지점이다. 5년 가까이 촬영하고, 6개월을 거의 매일 편집했다.

-그렇게 동서대학교에서 강의하는 장면을 지나 또 한 차례 의외의 순간이 등장한다. 임권택이 80살이 넘어서 천주교의 세례식을 받는 걸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이제 와서 굳이 세례를 받은 이유도 궁금하지만 굳이 그 이유를 묻지 않고 세례식 과정을 공들여 담아낸 이유가 궁금해졌다.

=임권택 감독님은 종교가 없다. <만다라>를 찍을 때도 불교를 믿은 게 아니고, <개벽>을 찍었다고 천도교를 믿은 사람도 아니다. 그런 분이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까 신기하지 않나. 감독님께 조심스레 여쭤봤더니 “내가 믿는다기보다는 이게 가족을 편하게 해주는 거야”라고 하셨다. 세례식 장면을 넣기로 한 이유는 거기에 있다. 가족을 위한 결정인데 이걸 보여주면 다른 생활상은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충분하겠다고 판단했다. 세례식 장면을 보면 감독님이 굉장히 낯설어하신다. 성당에서 보면 전부 사모님께 인사를 하지 아무도 감독님을 아는 체하지 않는다. 의식을 진행하는 동안 육체를 완전히 맡겨버리는 모습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끝나고 나서 숙제를 끝낸 아이처럼 홀가분해하신다고 느꼈는데 그것도 재미있었다.

-이어지는 장면은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연출한 단편 <주리>의 촬영 현장이다. 어떻게 보면 감독 임권택에게 가장 익숙한 공간일 텐데 어딘지 쓸쓸하게 주변을 배회하는 인상으로 포착했다.

=영화 현장을 가면 스탭 이외에는 모두 구경꾼이다. 거추장스런 짐이다. 임권택 감독님도 남의 현장에서는 조심스럽다. 그때 이미 두편의 영화가 엎어진 상태였던지라 현장에서의 쓸쓸함이 더 컸을 것이다. 본인의 배우이기도 한 안성기, 강수연 배우가 연기하는 걸 구경해야 하는 게 어떤 심정일까.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지만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한 상태. 심지어 그 와중에 주변에서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부지런히 자기 영화를 찍고 있고. (웃음)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무겁게 가라앉은 순간이 있다면 여기일 거다. 심지어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은 채 생각에 잠기셨기에 가만히 그 옆에 서 있었다.

-이 영화의 모든 포커스는 임권택 감독을 향해 있지만 유일하게 예외를 허락받은 사람이 부인 채령 여사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채령 여사가 부엌에서 등장하는데 이 촬영방식이 의미심장하다. 어둠 속에 잠겨 실루엣만 나온 상태에서 이야기를 이어가신다.

=임권택 감독을 가장 오랜 시간 곁에서 본 사람이 누굴까. 처음엔 채령 여사를 찍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분은 채령 여사밖에 없을 것이다. 집을 지킨다는 의미는 부엌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부엌은 온전히 채령 여사의 공간이다. 임권택 감독님의 집에서 이미지적으로 제일 볼 게 없는 공간이 바로 부엌이고, 그래서 부엌을 담아야만 했다. 낮에 찍는데 채광 상태가 안 좋아서 촬영감독이 불을 켜려고 했는데 그냥 그대로 가자고 했다. 어둠 속에 잠겨 약간 지워진 상태가 채령 여사 같았다. 꽤 유명한 배우였던 그녀가 결혼과 함께 은퇴하고 당시 별로 유명하지 않았던 임권택의 그림자를 자처했던 것. 그게 채령 여사의 삶이고 부엌의 성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면의 포커스는 차창 밖의 녹음에 맞춰져 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간 임권택 감독님의 시퀀스에서 창가의 화분과 저 멀리 산을 한 프레임에 찍었는데 같은 맥락이었다. 영화를 찍을 땐 저 멀리 산과 같이 고요하게 있는 사람. 동시에 작은 화초처럼 조용히 살았던 사람. 집과 영화 현장을 오갔던 101번의 시간. 두개의 삶이 거기 있다.

-그다음 붙어 있는 시퀀스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이고 동시에 선명하다. <화장>의 스탭 회의 후 돌아오는 길에 2013년 말 철도민영화 반대 시위 장면을 담았다.

=영화를 찍는 동안에도 세상은 각자의 시곗바늘 아래 돌아간다. 개인의 삶과 세상의 삶은 평행하지만 무게추가 다르다. <녹차의 중력>이 임권택의 삶이라면 세계의 중력은 어디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지 보여주고 싶었다. 멀리 떨어진 언젠가의 사건이 아니라 딱 그날, 중력은 어떻게 균형을 맞추고 있을까. 그 시위가 스탭 회의날 있지 않았다면 안 찍었을 거다. 그건 <화장> 스탭과 가진 첫 번째 회의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막상 말로 설명하면 어딘지 촌스럽고 밋밋한데 그게 화면으로 구현될 때 설명하기 힘든 감흥을 자아낸다. 가령 어둠 속에 잠겨 실루엣만 나오는 채령 여사는 ‘평생을 뒤에서 헌신한 아내의 초상’을 상징했다고 표현할 수 있지만 그렇게 지정하는 순간 여러 의미와 가능성이 차단되어 평평해진다.

=정확하다. 그래서 영화로 찍은 거다. 임권택 감독님이 녹차를 우리는 모습을 글로 옮길 수 있었다면 이 영화를 안 찍었을 거다. 때론 언어가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을 직접 목격한다. 언어의 한계에 부딪칠 때 이미지가 그걸 너무 쉽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한다. 그걸 제대로 포착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감독님을 설명할 때 매번 느꼈던 나의 비평의 한계를 확인할 때마다 그 자리에 영화가 오길 소망했다. 영화 속 오브제로 활용된 사물들은 예외 없이 임권택 감독님을 거쳐간 것들이다. 감독님이 만진 적이 있거나 그의 시선이 머문 적이 있는, 그가 발하는 중력의 반경에 있는 것들이다. 임권택이 세상과 교감하고 있는 대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그리고 그걸 ‘설명’하지 않고 ‘담아내는’ 것이 영화의 아름다움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세월의 무게를 느낄 것이고 누군가는 비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평론가처럼 말하자면 대상과 사물간의 감응을 카메라를 통해 도와주고 싶었다. 영화를 본 나의 동료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시네필들의 (비평이 아닌) 감흥이 궁금하다.

정성일을 말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아직도 임권택이 궁금한가.

=궁금증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해야 할까. 깨달음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고. 나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스스로를 갱신하고 있다고 할까. 물리적인 정보로서의 임권택은 내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기록되고 말해질 수 있다. 젊은 시절 내가 했던 질문과 그때 들었던 답이 이제 와서 보면 다르게 다가온다. 그때는 내가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구나라는 걸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절감한다. 1986년 11월 둘쨋주 화요일 아침, 임권택 감독을 처음 만나 인터뷰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 뭐 들을 게 있겠어요?” 그땐 그저 겸양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이 “젊은 당신이 온전히 이해하기엔 시간도 경험도 부족하다”는 뜻이란 걸. 때로 언어의 행간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월이 필요한 것 같다. 임권택을 향한 질문이 끊임없이 새롭게 피어나는 게 아니다. 같은 질문이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또 다른 시야가 열리는 중이다. 당연히 질문도 계속된다. 함께 나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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