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은 하나의 고유한 과제를 수행하는 글이다. 짧은 글임에도 칼럼은 세상사와 사람살이에 대해 의견을 제시해야 한다. 그 의견은 “진리값” 혹은 최소한 진리에 가까운 근사값의 산출을 목표로 한다. 칼럼은 참됨을 찾아가는 짧은 여정이다.
한달에 한번, 매번 다른 사안과 주제에 대해 참된 의견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문득 한없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칼럼을 시작할 때는 가볍게 생각하곤 했다. 재밌게 써보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마음으로 써보자. 독자들과 수다 떠는 마음으로 써보자. 문제는 쓸거리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쓸거리는 늘 차고 넘쳤다. 수많은 칼럼들이 수많은 사건들에 대해 갑론을박한다. 상이한 세계관과 문체로 작성되지만 칼럼은 대체로 동일한 규칙을 따른다. 의미 있는 사건에 대한 참된 의견의 제시. 나 또한 그러한 규칙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모두들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나마저 거기 동참해야 하나 싶어 침묵하다가도, 때로는 떠밀리는 마음으로(아무도 나를 떠밀지 않았지만), 때로는 할 말은 해야겠다는 마음으로(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지만) 결국 “그 사건”에 대한 의견을 내놓곤 했다.
칼럼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암묵적 전제를 수용해야 한다. “나는 할 말이 있다. 나는 의견이 있다. 나의 할 말과 의견은 독자들에게 경청할 가치가 있어야 한다.” 칼럼은 쓰기 과정에서 내게 “지식인됨”에 대한 자의식을 끊임없이 부추긴다. 심지어 칼럼을 통한 “지식인 되기”에 대해 비판적인 칼럼도 두어번 쓴 것 같다. 그런 칼럼에서조차 위의 전제는 적용되었다. 즐거움이 유지되는 한, 칼럼이 야기하는 긴장은 받아들일 만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내 지식인 자의식은 안팎으로 도전받았다. 그리고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지식인이 아니다. 지식인을 비판하는 지식인도 아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세상만사와 사람살이에 대해 주기적으로 참된 의견을 내놓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참된 의견을 추구하는 글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때로는 필요에 따라 강력한 의견을 제시하는 식의 글도 써봤다. 그런 글은 나름의 내적 분투를 거쳐 작성되기에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 변화되는 값진 경험을 얻기도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의 업 중의 하나는 독자들과 함께 사유의 형성과 발전을 나누는 것이다. 짧은 주기에 작성되는 짧은 글에도 분투는 있다. 나는 그 분투가 즐거웠으면 했고 독자들도 그러기를 바랐다. 그러나 어느새 나는 (어쩌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의견의 무게에 압도되었다.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의견에 관한 한 나는 무능하다. 불확실성과 혼란이 나의 참된 상태다. 이 참된 상태가 나로 하여금 칼럼을 쓸 수 없게 만든다. 면목이 없지만 나는 지금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지금 세상사와 사람살이에 대해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칼럼을 쓸 자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