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시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추리 작가 할란 트롬비(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마침 가장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였던 가족과 고용인들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라이언 존슨 감독의 <나이브스 아웃>은 마치 S. S. 반 다인의 저택 살인 미스터리 소설을 현대로 옮겨놓은 듯한 영화다. 으스스한 수집품으로 채워진 저택은 할란 트롬비의 머릿속을 고스란히 반영한 공간으로 화려한 앙상블 캐스트에 걸맞은 무대다. 특히 각양각색의 무수한 단도를 거대한 동심원 모양으로 부착한 장식물은 가족이 한 사람씩 심문받는 숏 뒤쪽에서 섬뜩한 후광을 그리며 디오라마 노릇을 한다. 나아가 영화 후반에 탐정 브누아 블랑(대니얼 크레이그)은 할란 트롬비 사건을 가운데가 빈 도넛에 비유하는데, 칼 장식의 전체 형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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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로버트 드니로와 조 페시는 76살, 알 파치노는 79살이다. 한 인물의 30대부터 80대까지를 70대 배우가 연기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아이리시맨>의 디지털 디에이징 효과는 얼굴에 국한된다. 당연히도 마틴 스코시즈 감독은 배우들이 얼굴에 마커를 잔뜩 붙이고 연기하는 상황을 바라지 않았고 <아이리시맨>의 테크놀로지는 ‘디지털 메이크업’에 가깝다. 하지만 <캡틴 마블>에서 젊은 닉 퓨리를 연기한 새뮤얼 L. 잭슨이 보여준 대로 신체의 움직임을 젊게 고치기는 어렵다. 물리치료사까지 참여했다지만, 달리고 던지고 때리는 <아이리시맨> 배우들의 동작은 어쩔 수 없이 무겁다. 감독 역시 예상한 바일 테고, 촬영과 편집으로 이를 가리려는 시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애처로운 어긋남은 뜻밖의 멜랑콜리를 자아낸다. 수십년 전 갱스터영화의 대표작에서 위협적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이, 디지털 분장을 하고 혈기왕성한 범죄자를 재연하지만 영 뜻대로 되지 않는 모습 자체가, 패자의 회고록 같은 이 영화에 어울려버리고 만다. 게다가 <아이리시맨>은 노쇠한 프랭크(로버트 드니로)의 기억이다. 진술 내용과 엇나가는 둔한 움직임은 현재 늙은 신체의 감각이 스며든 결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아이리시맨>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연기는 스테레오타입을 역전시킨 조 페시와 지미 호파(알 파치노)에게 도전하는 전미운수노조 지부장 토니 프로 역할의 스티븐 그레이엄이다. 그래도 알 파치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번에도 웅변을 즐기는 외골수를 연기하지만 오버액팅으로 보이진 않는다. 지미 호파가 워낙 거물이기도 하지만 시나리오와 연출이 배우의 스케일을 잘 파악해서다. 알 파치노가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터지는 분통을 다스리려 애쓰는 모습은 <아이리시맨> 최고의 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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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러셀 버팔리노(조 페시) 아래에서 일하게 된 프랭크는 처음으로 권총을 써서 ‘수금’에 성공하고 귀가한다. 폭력의 여운에 젖은 프랭크는 낮에 식료품점 주인이 둘째딸 페기를 밀쳤다는 말을 듣자 페기의 손을 끌고 가게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딸이 보는 앞에서 주인을 보도로 끌고 나와 짓밟는다. “우리 가족은 아빠가 지킨다”가 프랭크가 의도한 메시지였지만, 경악한 행인들과 비슷한 거리에서 폭행 현장을 지켜보는 카메라는 딴판인 진실을 전한다(이 신에는 얼어붙은 페기의 클로즈업숏이 한 컷 삽입돼 있다). 이후 소녀는 적어도 영화 속에서 먼저 아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뒷날 페기는 프랭크의 새 상사인 지미 호파에게 열렬한 호감을 보이는데, 이는 공적으로 노동자의 대표로 알려진 지미 아저씨는 아빠나 러셀 삼촌과 달리 떳떳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믿어서다. 요컨대 지미를 향한 페기의 편애는, 아버지에 대한 수치심의 이면이다. 장편, 그것도 209분짜리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프랭크는 특이한 인물이다. 영웅은커녕 안티 히어로도 못 된다. 이 남자에겐 주변 인물과 비교해 주체적 의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1949년부터 2000년까지를 커버하는 <아이리시맨>은 아이젠하워 시대의 호황, 케네디의 당선과 쿠바 미사일 위기, 워터게이트 등 굵직한 사건을 묘사한다. 프랭크는 노동조합과 조직폭력의 다리 역할을 맡은 만큼 모든 사태의 중심에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의견이 없다. 줄기차게 TV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지만 견해는 드러내지 않는다. 프랭크는 의지 없는 핀볼로서 역사 속을 돌아다닌다. 그는 언제부터 이랬을까? 영화 초반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시절 그가 상명에 따라, 포로에게 구덩이를 파도록 시키고 사살해 곧장 떨어뜨리는 광경을 보여주는 플래시백은 희미한 힌트다.
<좋은 친구들>도 <카지노>도 암흑가 찬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스코시즈의 갱스터 전작에는, 물리력으로 서열화된 남성 사회의 질서가 가진 중독성을 감독이 깊이 이해한 결과, 폭력에 대한 도취를 낳는 대목이 있었다. 이 영화들을 돌아보는 관객은 압도적인 폭력의 스펙터클과 범죄의 섹시한 스릴부터 기억한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가 창작자의 의도와 별개로 서민을 등친 사기꾼 금융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미화했다는 억울한 비난을 받은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전작들과 동일한 원소들로 구성됐으나 <아이리시맨>의 살인과 폭력은 투박하고 멋없다. 오페라적 장엄미 따윈 없다. 어정어정 다가가 탕탕 총을 쏘면 덧없이 사람이 죽어나간다. 프랭크가 한 음식점에서 표적을 제거하고 나오는 과정은 조악하기까지 하다. 어린이들이 포함된 가족 식사 테이블에 총질을 하는 짓이 마피아 일의 실체임을 영화는 그대로 보여준다. 주인공 중 한명의 죽음조차 영화적으로 특별 대접을 받지 않는다. 마틴 스코시즈는 최근 뉴욕 관객과의 대화에서 히치콕의 <싸이코>를 거듭해 볼수록 유명한 샤워 신 말고 평범한 장면의 프레이밍에서 ‘시네마틱함’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아이리시맨>의 영화적 클라이맥스도 총격이 아닌 대화와 시선으로 이뤄진다. 스코시즈는 시간을 늦추고 인물의 관계를 연기와 블로킹으로 상술한다. 프랭크가 노조에서 공로를 인정받는 연회 시퀀스는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지미 호파와 적대자들, 중간에 낀 프랭크, 그 모두를 염려스럽게 관전하는 페기의 시선으로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다. 여행 도중 프랭크에게 러셀이 조직의 결정을 통보하고 실행을 권고하는 긴 시퀀스도 마스터클래스다. <아이리시맨>은 절정에서 오히려 호흡이 느려진다. 느림은 행위에 대한 생각을 낳고 생각은 비애로 이어진다.
<아이리시맨>은 종착점에서 기다리는 죽음과 회한의 인력으로 나아간다. 러닝타임의 마지막 1시간은 <순수의 시대>(1993)와 <사일런스>(2016)가 짐작보다 이 영화와 지근거리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프랭크는 모두가 살해당하거나 병들어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는다. 그의 삶에서 거대한 이름이던 지미 호파는 세상에서 잊히고 가족은 만남을 거부한다. 마틴 스코시즈는 프랭크를 동정하거나 구원하지 않음으로써 영화를 한 단계 위로 들어올린다. 프랭크는 끝까지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누구에게 무엇을 사과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다. 아니 실패조차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체력과 지력을 잃어간다. 보호할 이들이 이미 없는데도 단지 관성으로 진실을 함구하는 노인은, 비스듬히 열린 문 사이로 죽음이 찾아와 ‘끝’을 명령해주기만 기다린다. 스코시즈는 거기 남자를 내버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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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기(猫技)
배우 나카무라 유코 본인의 반려묘일까? 로케이션으로 헌팅한 집에 원래 살던 고양이 아닐까? <윤희에게>에서 쥰(나카무라 유코)과 고모 마사코(기노 하나)의 동거묘 쿠지라로 분한 폰즈의 연기가 하도 자연스러운 나머지 드는 의문이다. 튼실하고 둥그스름한 실루엣부터 존재감을 발산하는 폰즈는, 말수 적은 두 식구 사이에 수년째 그래왔다는 듯 태연히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의 장례 후 고모가 퇴근한 쥰에게 포옹을 청하는 섬세한 감정 신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타이밍에 쥰을 마중하고 쑥스러운 대화 직전에 프레임에서 빠져나갔다가 긴장이 해소되면 다시 가볍게 스쳐간다. 대화 맥락에 맞춰 알아서 블로킹을 하는 고양이라니, <캡틴 마블>의 구스가 연말에 라이벌을 만났다.